|
버지니아는 말이 없었다
|
[뉴스+α] ‘버지니아 참극’ 그후 50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4월16일(현지시각)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재미동포 조승희(23)씨가 총기난사 참극을 저지른 지 4일로 50일이 됐다. 자녀 교육과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미국에 이민한 조씨 가족이 맞닥뜨려야 했던 비극은 ‘미국 짝사랑’이 뜨거운 한국 사회에 충격의 꼬리를 짙게 남기고 있다. 하지만 조씨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는지를 두고는 아무도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는 4월20일부터 한 달 동안 버지니아공대와 조씨의 가족·친척이 둥지를 튼 버지니아주 센터빌, 메릴랜드주를 샅샅이 훑으며 ‘왜’를 찾아봤다.
미국 버지니아주 센터빌에 있는 고 조승희씨 가족의 집에서 버지니아공대로 향하는 81번 고속도로를 달렸다. 지난 4월22일(이하 현지시각). 차창 밖으로 푸르른 4월 하늘이 펼쳐지고, 그 하늘에 닿을 듯 날씬하고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연녹색 들판 위엔 점점이 소떼들만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아, 아름답다!’ 탄성의 여백에, 카메라에 대고 저주를 퍼붓던 조승희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도 지난 4년 동안 셀 수 없이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빛나는 나이 23살. 대학 졸업반인 또래들이 취업과 연애를 고민할 때, 차창을 내다보던 그의 머리 속엔 어떤 풍경이 지나치고 있었을까?
#1 풀리지 않는 의문, ‘왜?’
조승희의 총구가 불을 뿜은 일주일 뒤인 4월22일 버지니아공대 드릴필드 광장에선 한인 기독교 학생 30여명이 희생자를 위로하는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추모석과 촛불, 꽃다발이 즐비했고, 살아있던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조승희 추모석 옆에는 “너를 돕지 못해 미안하다”는 애도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조승희를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기도회에 참석한 한인 학생 몇 명을 거쳐서야 조승희와 같은 전공수업을 들었다는 김명현씨와 겨우 통화가 이뤄졌다. 사고 직후 학교를 떠나 있다는 그는 “교수님이 ‘승 조’라고 출석을 불러서 그가 한국인인 줄 알았을 정도”라며 “교수님이 농담을 던져도 늘 무표정했고, 수업이 끝나면 말 한 번 붙일 겨를 없이 사라지곤 했다”고만 기억했다.
‘미디어 출입금지’ 안내문이 붙은 기숙사 하퍼홀. 이곳에서 조승희와 같은 방을 썼다는 룸메이트들조차 그에 대해 기억하는 게 거의 없었다. 룸메이트 6명 가운데 유일하게 전화 인터뷰에 응한 캐런 그루얼 역시 “조그만 목소리로 묻는 말에만 ‘응’, ‘아니’만 답할 정도였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했다.
버지니아공대에서 한인 학생을 지도하는 이종남 연구원(임학·임산제조학)을 찾아갔다. 그는 “한인 학생 모임에서 조승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과연 그가 자신을 한국인이라 여겼겠느냐”고 되물었다. 조승희는 7살에 미국에 이민을 왔으니 한국말보단 영어에 익숙했을 터다. 그는 한인 여학생이 아닌 미국 여학생을 따라다녔다. 이 연구원은 “대개 일찍 이민 온 1.5세나 2세 동포들은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점차 인종간 벽을 느끼게 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일이 많다”며 “조승희의 경우 양쪽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을 수사 중인 스티븐 플래허티 버지니아 경찰청장은 지난달 21일 “(사건 현장인) 노리스홀에서 실탄 203발을 발견했다”며 “조승희가 범행을 철저히 준비한 것으로 여겨지며,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조짐은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매우 고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만 했지, ‘왜’에 대한 해답은 주지 않았다.
‘버지니아 참극’ 그후 50일…일상으로 돌아간 ‘버지니아텍’
이민초기 언어장벽에 자꾸 안으로 숨어
영어 짧은 부모도 학교생활 해결 못해줘
추모현장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2 ‘고치’ 안으로 숨은 아이
비극의 뿌리를 조승희의 이민사에서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버지니아공대에서 다시 조승희가 살았던 버지니아주 일대와 그의 친척이 살고 있는 매릴랜드주로 발길을 돌렸다. 조승희 가족이 사는 버지니아주 센터빌 일대는 말 그대로 한인타운이다. 센터빌과 같은 생활권으로, 먼저 형성된 한인타운 애난데일에는 한국어 간판이 즐비했다. 이곳이 한국인가, 미국인가 싶을 정도였다. “애난데일에 가려면 한국 비자가 있어야 한다는 농담도 있다”는 한 한인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이처럼 한국적인 환경도 조승희에겐 포근한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
지난 2005년 조승희의 어머니에게 전도했다는 최아무개씨를 만났다. 최씨는 “승희가 미국에 와서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만 다녀오면 가방을 던지면서 학교에 안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조승희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승희가) ‘나는 멀쩡한데 왜 자꾸 나를 이상한 애 취급하는지 모르겠다’고 해요. 애가 얘기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니까 입을 다물어버린 것 같아요.”
센터빌의 한 한인교회에서 2000년부터 2년 동안 조승희를 지도했던 김아무개 목사 역시 “승희 어머니가 ‘이민 와서 백인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아이를 보냈는데, 영어를 잘 못한다고 놀림을 많이 당해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었다’는 얘기를 했다”며 “지금이야 이에스엘(ESL·외국인 대상 영어수업)이 잘 마련돼 있지만, 승희네가 이민 왔던 10여년 전에는 그런 게 잘 안돼 있어 애가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
버지니아공대 학생들이 교내 드릴필드 광장에 마련된 추모석 앞에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자는 염원을 담아 흰 꽃으로 버지니아공대를 상징하는 글자 ‘VT’를 새겨놓았다.
|
이민 초기 언어 장벽에 부딪혀 상처를 받았던 조승희는 자신을 ‘고치’ 안에 가두는 방법을 택했던 것 같았다. 조승희와 함께 웨스트필드고교 및 같은 교회를 다녔다는 김지은(22)씨는 “승희 오빠는 늘 학교 버스에서도 혼자 앉아 창 밖만 내다봤고, 밥도 늘 혼자 먹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오히려 조승희의 상처를 키운 듯했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 농구나 축구를 할 때 아무도 승희를 팀에 끼워주려고 하지 않았다”며 “짓궂게 굴어도 아무런 대응도 안 하니까 나이 어린 애들까지도 승희를 툭 치고 지나가는 등 함부로 굴었다”고 말했다. 고교 동창인 크리스 데이비스는 미국 <엔비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영어수업 도중 교과서를 소리 내 크게 읽어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말없이 바닥만 보고 있는 조승희에게 교사가 ‘F’ 학점을 주겠다고 하자 그제야 입안에 뭐가 들어있는 것처럼 특이하고 낮은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며 “그때 교실 전체가 웃음바다가 됐고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야유가 쏟아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민 뒤 이런 문제를 겪는 게 조승희 뿐일까. 김 목사도 1999년 두 자녀를 데리고 이민 왔다. 그는 “처음 이민 왔을 때 아들을 지도하던 프랑스인 여자 선생님이 별 것도 아닌 일에 영어 못하는 아들에게만 주의를 줘 아들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당시 영어를 잘 못했던 김 목사는 전문 통역사를 데리고 학교에 찾아가 교장과 교감, 해당 선생님에게 부당함을 따져 문제를 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씨 어머니는 김 목사처럼 대처하지 못했다. “승희 엄마가 ‘영어를 잘 못해 애가 힘들어 할 때 학교에 가서 어떻게 해주지 못한 게 한이 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최씨는 전했다. 조승희가 다녔던 웨스트필드고교는 2000년 9월 개교 때만 해도 백인 학생이 80%를 차지하고, 한인 학생은 1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고교에서는 교장 재량으로 학부모의 고충을 도와주는 ‘학부모 연락관’(Parent Liaison)을 둘 수 있지만, 웨스트필드 고교에는 조승희가 졸업한 뒤인 2004년에야 학부모 연락관이 생겼다.
#3 밝혀지지 않은 어둠
최근까지도 버지니아주 경찰은 총기난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승희의 ‘정신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조승희가 2005년 12월 2명의 여학생을 스토킹하고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자살을 언급하는 전자우편을 보낸 뒤 ‘요양이 필요한 정신적 질병상태’라는 진단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인터뷰했던 한국의 외가 친척들 역시 “승희가 어렸을 때부터 말이 없어 부모들이 무척 걱정했다”는 말을 했다. 조승희가 살던 센터빌 지역의 주변 인물들도 그가 정신적 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김 목사는 “승희에게 자폐증이 있을 수도 있으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승희의 어머니에게 얘기했지만, “아이를 완전히 정신병자로 낙인 찍게 될 텐데 그러면 어떻게 사회에 진출하고 장가를 가겠느냐”는 반발에 부닥쳤다고 한다.
그랬던 어머니도 결국 아들을 병원에 데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조승희의 대학 진학용 건강진단서를 떼줬다는 한인 의사 이아무개씨는 “약물 치료를 받았는지 여부는 기억나지 않지만, 조승희가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는 얘기를 어머니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보다 10여년 전께 조승희가 건강진단서를 떼러 병원에 온 적도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조승희는 “완전히 정상(perfectly normal)”이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의 이런 말에도 불구하고, 조승희가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없다. 조승희를 부검한 윌리엄 머슬로 박사는 “부검으로는 그의 뇌에서 신경이나 화학적 이상 여부를 가려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자폐증등 정신적 질환 뚜렷한 증거 없어
진실 밝혀줄 가족들은 사건 이후 집비워
“교훈만 수습한 채 잊어주는 게 도움”
#4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버지니아공대 학생들이 교내 드릴필드 광장에 마련된 추모석 앞에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자는 염원을 담아 흰 꽃으로 버지니아공대를 상징하는 글자 ‘VT’를 새겨놓았다.
|
사건 이후 이곳 한인사회에서 조승희의 과거를 재구성해내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돼가고 있었다. 조승희의 부모가 다녔다는 센터빌 인근의 교회와 세탁소 등을 돌아다녀 봤지만, 얘기가 길어질수록 “그랬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다”거나 “신문에서 읽었다”는 말이 마지막인 경우가 많았다. ‘확인 안 된’ 소문과 이미 언론에서 한차례 ‘가공된’ 얘기들이 구별없이 섞여, 조승희와 그 가족들의 삶은 실체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미국 유력 신문에서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기사화했다는 불만의 소리들도 들렸다. 설령 이런 말의 홍수 속에서 용케 진실을 건져낸다한들 과연 조승희의 머릿속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할까.
결국 조승희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었는지, 어떤 상처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던 건지, 진실에 가장 가까운 답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은 가족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건 뒤 한 달이 넘도록 센터빌의 집을 비운 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권태면 주미총영사는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가족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건 뒤 조승희의 누나를 대신해 <에이피통신>에 사과 성명을 전달했던 웨이드 스미스 변호사에게 몇차례 전자우편을 보내봤지만, 돌아온 답은 “(조씨 가족은) 정말 착한 사람들인데 지금은 무척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뿐이었다.
조승희의 작은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는 센터빌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매릴랜드주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자그마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몇차례 그를 찾아가 들은 대답은 “노 코멘트”(말하지 않겠다)와 “겟 아웃!”(나가라!) 단 두 마디였다. 충혈된 그의 눈이 계속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귀국을 앞두고 다시 찾은 조승희네 집. 잔디를 깎고 있던 이웃집 주민 개리 히긴스는 “사건 뒤 집에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말이 통하지 않아 ‘헬로’밖에 못했지만 좋은 사람들 같았다”며 “주변 사람 눈 때문에 돌아오긴 힘들 테지만, 승희 부모가 돌아오면 이웃으로 잘 감싸주겠다”고 했다. 조씨 집과 같은 골목에 위치한 또 다른 집에 반쯤 내려 걸린, 커다란 버지니아공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조씨 가족은 히긴스의 좋은 이웃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
한 달 넘게 굳게 잠긴 조승희네 현관문 앞에는 겉에 ‘조승희 부모 앞’이라고 적힌 편지 몇 통과 인터뷰를 원하는 기자들의 명함, 그리고 위로의 꽃다발만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집 앞 주차장에는 조승희의 아버지가 몰았다는 푸른색 소형차가 세워져 있었다. 10여년은 족히 됐을 법한 이 차를 몰고 아버지는 매일 세탁소로 일하러 가고, 방학·개학 때면 81번 고속도로를 4시간씩 달려 버지니아공대로 아들을 태워다 주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길을 달리며 이민의 고통을 털고 그 속에서 싹틔운 희망인 아들 승희를 대견스럽게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조승희의 가족들일지도 모른다”며 “빨리 잊어주는 게 제일 큰 도움”이라던 김인억 워싱턴지구한인연합회 회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조승희가 못다한 말들을 찾아 한달 가량 미국 땅을 돌아다닌 끝에 도달한 결론 치고는 너무 단순한지 몰라도, 그가 옳아보였다. 가족들은 다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고, 조승희의 비극은 그 뼈저린 교훈만 수습한 채 어서 떠나보내야 할 기억이 아닐까. 그래서 애써 홀가분한 마음으로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버지니아여, 안녕. 조승희여, 안녕. 블랙스버그, 센터빌, 웨스트리버/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한인 청소년 27.6% ‘우울증’…부모들, 낙인 찍힐까 ‘쉬쉬’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