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뒤 초저금리 정책 ‘재앙의 씨앗’
유동성 과잉으로 집값 거품·신용위기 불러
9·11테러가 7년 뒤 결국 미국의 심장부 월가까지 집어삼켰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이 나오면서, 7년 전 9·11테러가 월가의 상징이던 세계무역센터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월가를 파산시킨 원인이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정부가 9·11 이후 경기침체에 대비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금리를 내려 과잉유동성을 키운 것이 이번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현재 금융 위기의 뿌리인 서브프라임 사태는 9·11 테러의 충격으로부터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장기간의 저금리 정책이 낳은 결과이다.
2000년 하반기부터 미국은 정보통신(IT) 산업 부문의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급속한 경기 침체기로 빠져들었다. 미국 상무부 경제분석국(BEA)의 자료를 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00년 3분기에 1%에도 못치는 성장률을 보인 뒤 2001년 들어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다. 이 와중에 터진 9·11 테러는 경기 하강국면에서 위축됐던 미국의 투자 및 소비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한 결정타였다.
위기를 타개할 구세주가 절실했다. 미 연준(FRB)의 앨런 그린스펀 당시 의장은 ‘초저금리 정책’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연준은 2000년 5월 6.5%였던 연방 금리를 2003년 6월까지 13차례에 걸쳐 1%대까지 떨어뜨렸다. 특히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1월 이후 2% 이하의 저금리가 3년간이나 지속됐다. 이에 힘입어 2001년 4분기에는 국내총생산이 오히려 2.7% 성장세로 돌아섰다. 이듬해인 2002년 1분기에는 5.0% 성장을 기록했다.
넘쳐나는 유동성의 상당 부분이 주택 및 금융 파생상품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조지 소로스는 최근 저서 <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미국의 금융기관 등 대출업자들은 이자 수입을 늘리기 위해 주택을 실제보다 훨씬 매력 있는 자산으로 보이게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은 이미 5년 전인 2003년에 이같은 파생상품들을 ‘시한폭탄’ ‘금융의 대량살상무기(WMD)’에 빗댔다. 그 시한폭탄들이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하면서 금융시장을 초토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 보코니대의 티토 보에리 교수는 지난해 ‘서브프라임 위기:그린스펀의 유산’이란 논문에서,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인으로 △미국 가계들의 낮은 재무지식 △유동자산의 대규모 증권화를 가져온 금융제도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3년에 걸친 초저금리 정책을 꼽은 뒤, 이 중에서도 저금리정책이 절대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연준 이사진에선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에 방만한 금융대출 관행의 실태와 파장을 점검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린스펀은 묵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린스펀은 지난해 9월 <시비에스>(CBS)와의 인터뷰에서 “경제가 작동하길 원한다면, 얼어붙은 미국 은행시스템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 임무다. 이것은 금리를 서서히 내릴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저금리로 인한 유동성 과잉과 파생상품의 범람, 무책임한 서브프라임 대출이 불러온 위기에 대해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아주 최근까지 아무런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미국의 정치외교력을 손상시킨 9·11테러는, 미국 정부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과잉대응해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라는 참사의 밑바탕이 됐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패권에 타격을 주려는 9·11테러는 결국 그 목적을 일정 부분 달성한 셈이다.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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