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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27 17:42 수정 : 2008.10.27 17:42

문득 6년 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기다리며 인터넷으로 흥분하며 밤새 결과를 초조하게 지켜보다가 아침에 당선확정 소식을 듣고 컴퓨터 앞에서 기쁨의 환성을 지르다가 뛰었다가 하면서, 결국 아내를 껴안고 펑펑 눈물을 흘리며 "이제,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어"라고 말하며 눈물로 범벅된 환한 웃음을 웃었던 그 날이 떠오르는 것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는 제 희망 하나 때문이겠지요. 집으로 배달되어 온 부재자 투표용지를 열었습니다. 우체부인 저도 요 며칠 동안 제 구역에서 무척 많이 배달했지요.

시애틀과 이 주변을 포함하고 있는 킹 카운티(우리나라의 군 정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지역은 모두 우편 투표를 상시화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시민권자들은 영구 부재자투표 등록을 하게 되고, 등록이 된 사람들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건 과거 흑인을 비롯한 소수민족, 그리고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기 전, '일정한 재산을 가진 신사'에게만 투표권을 주던 관행이 다른 방식으로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건 간접적인 투표 방해 요인이 되기도 하지요.

미국이 민주주의의 본산이란 말이 100% 맞지 않다는 것은, 이 국민 투표 제도의 복잡성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복잡성은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장과정에서 WASP, 즉 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로 표상되는 이 나라의 주류들만이 이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선거는 뭔가 틀린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으로 WASP 가 아닌, 비주류계의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미국인들은 기대와 불안이 섞인 마음으로 이번 투표에 임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짐작컨대, 그 어느때보다도 투표율이 높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듭니다. 그럴수록 현재 미국 상황에서는 '변혁'을 원하는 유권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오바마를 찍을 것이고, 미국의 변화가 새로운 세계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것입니다.

원래 미국 대선은 11월 첫째주 화요일입니다. 올해는 11월 4일. 그러나 실제로 선거는 시작된 셈입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은 우편으로 배달된 투표용지에 표기를 하고 선거관리사무소로 재발송했습니다.

미국 선거의 특징은, 대통령 선거라 하여 대통령만 뽑는 것이 아니라, 각종 주민발의안에 대한 찬반여부는 물론, 각 지역의 입법 의원 선출, 선거직 법관의 선출, 지역 교육감 선출 등을 모두 동시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부재자 투표용지 발송 전에 모든 가정에 선거 및 투표 내용, 그리고 후보자들의 신상을 자세히 기록한 선거 팸플릿을 먼저 발송합니다. 물론 저도 그 팸플릿 배달하느라 힘들었지만, 역사를 바꾸는 데 한몫한다는 기분으로 열심히 배송했습니다. 물론 그날 저녁, 저희 집 우체통에도 똑같이 팸플릿이 들어 있었습니다.

몇몇 주민발의안들을 살펴보고, 찬반을 결정했습니다. 특기할 만한 주민발의안으로 눈에 띄는 것은 예전에 오리건 주에서 발의되어 통과되고 지금 시행되고 있는 안락사법이 있군요. 불치병 환자가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면, 의사와 전문가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의지로 존엄사를 택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법안입니다. 사실, 이 법안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착잡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제가 살고 있는 워싱턴주의 주민들이 오리건주의 법안을 카피해 내 놓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미국 의료 시스템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자신의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가족들이 받는 재정적 부담도 덜어준다는 뜻이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의 보험은 기업들이 운영하고 있고, 이윤 추구라는 그들의 목적 때문에 계속 비싸지는 의료비에 대한 커버를 모두 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국가에서 정년 후 삶을 위해 보장해주는 '메디케어'조차도, 의료비의 80%는 국가에서 부담해주지만 나머지 20%는 아주 극빈자가 아닌 이상은 스스로 부담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많은 은퇴자들이 이 20%의 부담만을 담당하는 보험을 따로 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암 같은 질병에 걸려 입원했다고 하면, 의료비로 10만달러 정도 깨지는 것은 미국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만달러를 국가가 메디케어 보험을 통해 처리해주고 나머지 2만달러는 스스로 부담하라 한다면, 2만달러의 돈을 의료비로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설사 운좋게 병에서 낫는다고 하여도 남은 평생을 의료비를 갚아가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껴져 결국 이런 주민발의안까지 나온 것이지요.


한참을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저는 이 법안에 찬성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극단적인 예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저 역시 나중에 혹시 무슨일이 생긴다면, 내 삶을 구차하게 연명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족들에게 무수히 부담 줘 가면서... 그러면서 스스로 다짐하게 됩니다.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한 삶 살아야지.. 하면서.

또 하나 중요한 사안은 교통체증 완화를 위한 대중교통 확보를 위한 공채안인데, 문제는 이 지역의 교통문제가 심각한 것엔 동의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에 대해선 사람들마다, 또 단체들마다 그 의견이 틀리다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도로를 확충하자고 말하지만, 이 지역이 평지가 아니다보니, 길을 새로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고, 혹여 다리를 이층으로 내어 도로를 건설하자니 이 지역이 지진 다발 지역이어서 선뜻 찬성하기 어렵고, 따라서 대중교통수단을 늘리자는 것인데 문제는 이게 채산성이 적다는 것입니다. 면적이 18만 4천 824킬로미터의 워싱턴주 전체 인구가 6백만명. 남한이 9만 9천 392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임을 생각할 때 남북한 합친것보다 조금 작은 이 워싱턴주에서, 그것도 메트로 지역만에서 교통수단을 확충하자니 당연 이용 인구가 적을 것이고, 이 때문에 주민들과 정부의 지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도로망을 더 확충하기 힘드니 나온 고육지책이고, 내년부터 운행 예정인 경전철의 운행 구간을 늘리는 등의 복안이 포함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세일즈 택스를 0.5% 더 올리겠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부가가치세'에 해당할 수 있는 세일즈 택스는 각 지역마다 틀리지만 킹 카운티 지역에선 현재 9%. 여기서 0.5%를 더 올리면 거의 10% 수준입니다. 식료품을 제외한 과세 물건을 구입할 때, 가격이 10달러 붙은 물건을 사면, 세금으로 95센트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동안 이 판매세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터라 통과여부는 불확실합니다. 저는 일단 찬성에 표를 던지긴 했지만...

이밖에 이런저런 주민발의안에 나름으로 찬반을 표시한 후 - 이게 꼭 우리나라에서 학력고사 보던 때를 생각나게 합니다. 아, 저 학력고사 세대고, 논술 첫 세대거든요- OMR 투표용지인지라, 동그라미를 새까맣게 칠해야 합니다. 자, 이제 중간쯤에 기대하던 이름들이 보입니다. 후보자군중 가장 위에 올라온 배럭 오바마와 조 바이든의 이름 옆의 동그라미에 새까맣게 칠합니다. 후보군들을 보니 '사회주의 노동자당' 도 있고, 무소속의 랠프 네이더도 보이고, 헌법당이라는 당도 있고... 그렇군요.

그 뒤에 줄줄이 주 상하원 의원들, 주 대법원 판사들을 뽑는 란이 있고, 팸플릿을 참조하여 그들의 성향과 정견을 읽은 후 다시 공란들을 칠해주고... 이렇게 제 투표는 마쳐집니다.

이번 대선의 의미 중 가장 큰 것은 미국이 과연 '변화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바마가 당선된다면, 세계가 미국을 보는 시각이 분명히 틀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공화당의 무책임했던 성장위주의 정책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자유무역 기조 역시 다시 보호무역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각 나라들은 무역보다는 오히려 자국 경제 단속에 나서야 할 때여서, 오바마의 당선 여부와는 상관없이 경제정책은 수출보다는 자국경기강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 분명하고, 그 때문에 오바마가 당선될 경우 그가 약속했던 대로 외국으로 나간 미국의 기업들을 다시 불러들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을 돌려줄 수 있을지, 그것이 제일 궁금합니다. 아무리 기업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그것이 자국민들에게 충분한 '구매력'을 보장해주지 않는 이상 기업은 마땅히 한 나라 안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할 자신의 역할을 피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국제관계에서, 오바마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현 정부처럼 공화당과의 친분을 더 중요시하고 맥케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는 국가들도 있을 터이지만, 그것은 이제 분쟁을 넘어서 평화를 갈구하고 있는 많은 세계평화애호시민들의 열망과는 반대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라는 것이 갖는 가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전쟁으로 죽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더욱 자명해집니다. 단지 분쟁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박탈당해 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는 더더욱 이 공화당 정권이 속히 끝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미국 와서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는 것이 이번으로 세번째군요. 제 한 표가, 새로운 미국이 도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그 폐해에 대해 심판하는 계기가 도래하기를 바래봅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아직까지 세계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으로 볼 때, 지금까지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가, 혹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변화로 인해 세계에 그 변화의 영향력을 파급시킬 수 있는가 하는 기로에서, 저는 실제로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결국은 미국 시민들에게만 주어져 있는 권리이기에 더욱 신중하고 현명하게 생각하려 애썼고, 고민 끝에 제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 해 제게 주어진 권리인 '한 표'를 행사했습니다.

11월 4일, 그 뚜껑이 열릴 때의 결과가 너무 궁금하군요. 꼭 오바마가 당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애틀에서...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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