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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정박한 쿠바 하바나항에서 쿠바의 전통공연가들이 나와 월드크루즈호 승객들을 환영하는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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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를 날렵하게 달리는 육중한 몸매의 버스가 인상적이다. 공식 명칭은 ‘메트로 버스’이지만 생김새가 낙타와 비슷하다고 해 ‘카멜’이란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대형 컨테이너 트럭을 일종의 ‘기관차’로 하고, 컨테이너 2개를 ‘객차’처럼 이어 붙인 게 가히 일품이었다. 한번에 350명까지 태울 수 있다고 하는데, 차량으로 가득한 시내 도로에서 버스가 회전을 할 때마다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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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하바나의 시내에선 50년을 지난 차량들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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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20만의 대도시 아바나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중교통이었다. 최근 중국 정부가 25년 동안 부품 공급을 책임지기로 하고 자국산 ‘유통’ 버스 200대를 납품했다고는 하지만 정류장마다 차를 기다리는 이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성미 급한 이들은 도심에서도 종종 히치 하이킹에 나설 정도로, 히치 하이킹은 교통수단이 절대 부족한 쿠바에서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코코택시도 어느새 중요한 교통수단이 돼 있었다.
거리는 깔끔하게 청소 돼 있었지만, 칠이 벗겨진 건물의 남루함을 가릴 순 없었다. 옛 소련은 신생 혁명국 쿠바의 경제를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다. 국제 시세의 5배에 쿠바산 설탕을 수입했고, 돌아가는 배편에 식량과 농기계를 실어 보냈다. 원유는 반값에 제공했고, 피델 카스트로 정권은 이를 재수출해 가용 외화를 확보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평화시기 특별기간’ 동안 쿠바인들의 삶이 얼마나 버거워졌을지 미뤄 짐작하기 어렵기 않다. 여기에 1959년 혁명 직후 시작돼 쿠바의 목을 조여 온 미국의 경제제재는 1992년 ‘토리첼리법’과 1996년 ‘헬름스-버튼법’ 통과로 그 강도가 한층 더해졌다. 어찌보면 피텔 카스트로 정권의 생존 자체가 작은 기적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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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하바나의 시내에서 교통란을 해소하기 트럭을 개조해 만들어 낸 메트로 버스. 이 버스는 300명가량의 사람을 태울 수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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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도시’에 왔으니 냉큼 그 상징부터 둘러볼 일이었다. 하지만 일정에 쫓기다 보니 이날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아바나 시내 중심가 혁명광장을 찾을 수 있었다. 드넓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의 거대한 석상 뒷편에 버티고 선 109m 높이의 혁명 기념탑으로 향했다. ‘문 닫을 시간이 됐으니 내일 다시 오라’는 안내원에게 ‘내일이면 쿠바를 떠나야 한다’고 사정해 간신히 출입이 허용됐다.
“지난 주에 허리케인 윌마가 위세를 부릴 때 전기가 끊긴 일이 있다. 하는 수 없이 1600개나 되는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했다.” 이미 불이 꺼진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타분했던지 또 다른 안내원이 의자에 앉은 채로 넋두리를 한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기념탑을 중심으로 쿠바의 중요 시설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기념탑 뒷편에는 카스트로의 사무실이 있는 국가평의회가 자리를 잡고 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왼편에는 육군본부와 국립도서관이 들어서 있고, 정면으로는 정보통신부와 내무부, 경찰본부가 자리해 있다. 내무부 청사 벽면에는 체 게바라의 대형 조형물과 쿠바 국기가 나란히 내걸려 있었다.
마르티의 석상 앞 넓은 연단은 카스트로가 특유의 군복 차림으로 대중 연설을 하는 곳이다. 기념탑을 바라보고 광장 왼편에 있는 대형 걸개그림에는 카스트로가 또 다른 혁명 영웅인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함께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바나 시내에서 카스트로의 동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몇몇 그림과 선전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바나 시내를 뒤덮고 있는 마르티와 게바라의 조형물에 견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험상궂은 얼굴을 한 보안요원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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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하바나의 혁명기념탑 전망대에선 바라본 하바나 시내 전경.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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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엘 크리스토 언덕에 올랐다. 쿠바의 대표적 조각가로 꼽히는 힐마 마데라가 1958년 만들었다는 거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석상이 그곳에서 아바나 시민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석상의 뒷머리에서 시작된 피뢰침이 발 뒤꿈치까지 기다랗게 늘어져 있는 게 특이하다. 혁명 직후 그리스도의 석상이 번개에 ‘수난’을 당해 일부가 쪼개진 일이 있다고 한다. 시민들이 석상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을 잘 알고 있던 국가평의회는 군을 동원해 급히 복원작업을 벌인 뒤, 성인의 안녕을 위해 피뢰침을 설치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석상이 아닌 듯 했다. 석상 뒷편에 자리한 국립기상청은 최근 허리케인 윌마가 쿠바를 강타했을 때 다시 한번 기민한 움직임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허리케인이 할퀴고 지나간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쿠바에서만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 쿠바인들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난 뒤 정치적 위기에 빠진 조지 부시 행정부를 겨냥해 “전쟁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족속들”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
풍족하지 않은 일상에서도 쿠바인들은 카리브해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정작 쿠바인들 사이에선 ‘비자발적 금연자’가 급격히 늘고 있지만, 쿠바가 자랑하는 시가와 특산 럼주를 즐기고 있는 이방인 앞에서 쿠바인들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멍청한 미국인들은 경제봉쇄로 정작 자기들이 뭘 잃고 사는지 모른다니까.”
그런 쿠바 역시 조금씩 바깥세상의 때를 타기 시작한 모양이다. 피스보트가 아바나 항구를 출발하던 29일 해질 무렵 승객들이 갑판 난간을 부여잡고 멀어지는 항구를 아쉽게 바라보고 있는데, 곁에 섰던 인도네시아 출신 승무원 한명이 “쿠바를 떠나게 돼 속이 다 시원하다”며 쓴 웃음을 짓는다. 일과를 마치고 전날 밤 늦게야 동료들과 아바나 시내에 나갔던 그는 터무니 없는 술값을 요구하는 ‘어깨들’한테 꽤나 시달린 눈치였다. 한달 임금이 미화 400달러 남짓인 이주 노동자들에게 맥주 1병 값으로 100달러씩을 내놓으라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 해 쿠바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무려 200만 명을 넘는다는 자료를 본 기억이 있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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