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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도착한 파나마 운하입구에 각종 화물선들이 운하를 따라 서서히 앞으로 가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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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한 황금 운반 하던 길이 두 대양을 잇는 관문이 되어
쿠바 아바나를 출항한 직후부터 토파즈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심상찮은 건 바다였다. 항구를 떠난 지 불과 30분도 채 안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바다가 온통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지만 성난 파도가 뱃전을 때려대는 소리에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상하와 좌우로 움직이는 침대가 회전운동을 하기 시작하는 게, 항해 초기 태풍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카리브해에서 허리케인과 마주친 것이다.이튿날 아침 선잠을 깨운 것은 함교에서 내보낸 ‘경고 방송’이었다. ‘허리케인 영향권에 들어 파도와 바람이 거세니 뱃머리 갑판은 폐쇄한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니,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반드시 손잡이를 잡고 이동하라. 선실에 깨질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바닥에 내려 놓기 바란다. 여성들은 절대 굽 높은 구두를 신지 말아달라….’ 이날 경고 방송은 두어 차례 되풀이됐고, 배 안 곳곳에는 낯익은 파란색 멀미봉투가 다시 비치됐다.
흔들리는 배 허리케인 영향권
“여성들은 절대 굽 높은 구두 신지 말라”
지난달 27일 니카라과 해안에서 만들어진 열대성 폭풍 베타는 이튿날 허리케인으로 등급을 올렸다. 허리케인에 대한 공식 기록이 시작된 1851년 이후 처음으로 한해 23번째 허리케인이 발생한 것이다. 시속 17노트로 남진하고 있는 토파즈호가 40~50노트를 불어오는 강풍을 견뎌내기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창 밖에선 토파즈호가 밀어내는 물살과 거센 파도가 만나 일으킨 포말이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성난 파도와 강풍에 맞서기를 이틀 째, 연안이 가까워지는지 바다는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1일 오전 파나마 크리스토바르 항구에 도착한 피스보트는 밤새 비를 맞으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동이 틀 무렵 움직일 차비를 갖추기 시작한 토파즈호가 오전 7시40분께 천천히 리몬만으로 들어섰다. 지난달 14일 밤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면서 시작된 대서양 항해가 마침내 그 대단원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륙을 가로질러 파나마 운하 82km를 통과하면, 피스보트는 태평양으로 귀환하게 된다.
폭풍우를 똟고 파나마 들머리에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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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들어선 파나마 운하에서 갑판에 나온 승선객들이 수문이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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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8시15분께 토파즈호는 파나마 운하의 들머리인 가툰 갑문을 향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천천히 나아가는 배 양편으로 펼쳐진 그림 같은 열대 우림은 온통 사막 뿐이던 수에즈 운하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운하로 통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부이를 따라 펼쳐진 물길 저만치에서 컨테이너선 3척이 차례로 가툰 갑문 1-2-3호기를 통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위가 일정한 수에즈 운하와 달리 위치에 따라 수위가 다른 파나마 운하는 가툰-페드로 미구엘-미아플로레스 등 3곳의 갑문을 통과해야 한다.
드디어 파마나 운하 통과의 서막이 열렸다. 오전 8시40분께 토파즈호는 첫번째 관문인 가툰 갑문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하철 역사로 들어서는 전동차처럼 갑문과 토파즈호 사이엔 간격이 좁다. 갑문 위에서 무전기를 들고 토파즈호의 진입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들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 들어서고 있다. 갑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배 양쪽으로 언덕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최대한 속도를 줄인 토파즈호는 갑문 구조물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진행방향 양쪽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관차와 밧줄로 연결됐다. 25인승 미니버스보다 작아보이지만, 대형 컨테이너 선박의 하중까지 견뎌내는 기관차의 대당 무게는 무려 50t에 이른다. 천천히 열차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눈 앞에서 21m 높이에 중량이 745t나 된다는 육중한 갑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파나마 운하 통과를 위한 1차 수위 조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갑문 안으로 진입한 토파즈호가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전화벨 소리와 비슷한 경고음이 울리면서 갑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한다. 닫힌 갑문은 운하 양쪽을 이어주는 다리 구실을 하는 지, 안전모를 쓴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갑문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모습이 흥미롭다.
승객들도 배의 부상을 기다리며 긴장된 침묵
두시간 남짓 산고 끝에 1차 관문 무사히 통과
후미 갑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갑판을 가득 메운 승객들이 배의 부상을 기다리는 동안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있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누군가 탄성을 울려 내려다 보니 운하 바닥에서 흙탕물이 일고 있다. 이윽고 배의 수위가 천천히 높아지기 시작한다. 수위가 올라감에 따라 배도 점점 떠오르면서 언덕과 시선을 맞추는가 싶더니 이내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갑문에 물이 반나마 차오르면서 갑문 바깥 쪽과는 이제 육안으로도 물 높이 차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간간이 빗발이 뿌리고 있는데도 승객들은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인간이 만든 경이로움에 넋을 잃은 채 열중하고 있다.
첫번째 부상이 끝났다. 넓이 33.53m, 길이 320m의 갑문에 무려 10만1천㎥의 물이 채워진 것이다. 갑문 최상단부까지 물이 들어차면서 토파즈호를 고정하고 있던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첫번째 갑문의 수위를 두번째 갑문의 수위와 맞추는 데는 불과 9분 남짓이 걸렸다. 오랜 만에 크루즈 선박을 만났는지 운하 직원들이 기념 촬영하느라 소동이다. 배 안의 승객들도 이에 질세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두번째 갑문에 들어섰다. 뱃머리 갑판에서 마주한 갑문은 더욱 육중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후미 갑판에서는 물이 반나마 들어 찬 모습이어서 갑문의 반 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예의 ‘전화벨 경고음’과 함께 다시 물이 차오르면서 배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역시 9분여 만에 세번째 갑문과 수위가 같아지자 갑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갑문 상단의 통로용 난간이 접히더니, 육중한 철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물길을 내준다. 양쪽에서 앞 뒤로 각 2대씩 4대의 기관차가 방향을 잡고 비좁은 운하를 따라 토파즈호를 이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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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들어선 파나마 운하 뒤로 한 화물선이 궤도차에 줄을 이은 채 서서히 운하로 들어오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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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갑문이 열렸다. 두시간 남짓의 산고 끝에 토파즈호는 처음보다 24m 높은 물길로 올라선 것이다. 토파즈호의 안전을 지켜주던 기관차와 연결돼 있던 굵은 철선도 걷어내고 배가 가툰 호수로 들어서자, 배의 중심을 잡느라 뱃머리에서 온갖 밧줄과 씨름 하던 운하 안전요원 10여명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번진다. 답답한 갑문을 빠져 나와 드넓은 호수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때마침 시원한 마파람이 불어와 습한 더위에 지친 구경꾼들의 땀을 씻어내 준다. 파나마 운하 통과를 위한 1차 관문을 무사히 지난 것이다.
2차 관문도 무사 통과 미아플로레스 호수로
총연장 19km에 이른다는 가툰 호수는 댐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너른 호수로 나오자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각종 선박들이 도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호수의 중심부로 천천히 나아가면서 짙푸른 열대 우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의 복판을 지나는 산등성이들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7~8층 높이로 화물을 가득 싣고 토파즈호 곁을 지나가는 컨테이너선의 모습도 장관이다. 지난 한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대양을 오간 선박은 모두 1만4035척으로, 이들이 운반한 화물만 2억300만t에 이른다.
호수를 빠져 나오면서 물길이 다시 좁아지기 시작했다. 울창한 열대 우림이 즐비한 사이로 뜨거운 햇살에 간간이 빗발이 뿌리는 내륙을 지나가는 느낌은 그야말로 묘했다. 리오 샤그레스 강을 따라 11km를 나아가자 파나마 운하의 2차 관문인 페드로 미구엘 갑문이 기다리고 있다. 유일하게 1단계로 갑문이 이뤄진 이곳에서 토파즈호는 약 9.5m 수위를 낮추게 된다. 수위를 낮추는 방법은 높이는 방법과 반대로 진행됐다. 역시 꼬마 기관차의 힘을 빌어 갑문 안으로 들어간 피스보트는 갑문에서 물이 빠져나가면서 갑문 밖 미아플로레스 호수와 수심을 맞췄다.
파나마운하는 페루·에콰도르에서 수탈한 황금 운반 길
황열병, 말라리아 창궐해 건설 중단되기도
파나마 운하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루와 에콰도르 등지에서 수탈한 황금을 운반하기 위한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고심하던 스페인 국왕 샤를 5세가 1524년 처음으로 파나마를 가로지르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명령으로 1529년 운하 건설계획까지 마련됐지만, 지중해 통제권을 둘러싼 유럽 열강의 각축전이 치열해진 데다 기술적 한계도 명확해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 뒤에도 대륙을 가로질러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니카라과를 관통하는 방안도 여러 차례 논의되다 폐기되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파나마 운하 건설 시도는 수에즈 운하 건설 성공으로 자신감에 들뜬 프랑스 기술진에 의해 1880년 1월1일 처음으로 감행됐다. 하지만 대륙을 가로질러 대양의 수위에 맞춘 운하를 건설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기술적 어려움에다 운하 건설지역에서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창궐하면서 결국 건설을 시작한 지 3년 여 만에 포기하기에 이른다.
지금의 갑문식 파나마 운하 건설공사는 콜롬비아 지배 아래 있던 파나마의 독립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운하 지역 통제권을 거머쥔 미국에 의해 1904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운하 건설의 책임은 미 육군 공병대가 맡았다. 그리고 착공 10년 만인 1914년 8월15일 완공을 기념해 화물선 앵콘호가 처음으로 대륙을 관통하면서 파나마 운하의 개통을 알렸다. 이후 85년 동안 미국은 운하 운영권을 틀어쥔 채 파나마 내정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미국은 지난 1999년 12월31일에야 파나마 운하에 대한 운영권을 파나마운하관리청(ACP)에 넘기고, 운하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자국군을 철수시켰다.
대서양 따라 대륙을 가로질러 10시간 만에 태평양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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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파나마 운하의 아메리카 다리를 마지막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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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로 이뤄진 미아플로레스 갑문에서 수심을 다시 16.5m 낮춘 토파즈호가 갑문을 빠져 나와 운하 어귀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한다. 서편 수평선은 이미 붉은 빛을 머금고 있다. 이날 오후 6시5분께 토파즈호가 아메리카스 다리를 지났다. 저 멀리 진행방향 왼편으로 이미 불을 밝힌 파나마 시티의 고층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부이를 따라 11km만 나가면 새로운 대양이 펼쳐진다. 대서양의 끝자락에서 대륙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지 10시간 여 만에 피스보트가 마침내 태평양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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