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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0 18:41 수정 : 2005.11.21 11:32

11월 8일 피스보트 51회 월드크루즈가 도착한 페루 비자 엘 살바도르에 판넬로 벽을 이어붙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지은 집들이 모여 있다. 비자 엘 살바도르/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빈민들이 모래언덕에 세운 ‘구원의 땅’

페루 수도 리마 남쪽에는 사막에서 시작된 도시가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모래 언덕에서 출발해 30여년 만에 6만 여 가구 40만 인구의 도시로 성장한 이곳은 ‘구원의 땅’으로 불린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황무지로 모여든 도시 빈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해 건설한 ‘비자 엘 살바도르’는 남미를 대표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한겨레>는 지난 7~8일 현지를 찾아 신화가 돼 버린 비자 엘 살바도르의 과거와 미래를 점검해봤다.

부유층 땅 점유로 사막으로 쫓겨난 빈민들
전기·물도 없는 곳서 “내집 짓겠다” 꿈
벽돌 한장한장씩… 34년만에 40만명 도시로

지난 8일 피스보트 51회 월드크루즈가 도착한 페루 비자 엘살바도르에 새로 들어서는 제3섹터 29그룹에서 만난 한 가족 중 아버지와 아들이 장난을 하며 웃고 있다. 비자 엘살바도르/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7일 오전 비자 엘 살바도르로 들어서는 길은 여느 가난한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먼지 바람은 황량한 분위기를 연출해냈고, 남루한 차림을 한 아이들은 떼를 지어 맨발로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은 다른 점이 감지됐다. 증축 공사를 하는 집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고, 거리와 구획이 반듯하게 나뉘어 있었다. 무작정 들어선 빈민가가 아님은 분명했다.

목수인 펠리페 파즈(66)와 재봉사인 로사 루이즈(63) 부부는 지난 1971년부터 비자 엘 살바도르 제2섹터, 8그룹에 살고 있는 정착 1세대다. 1963년 결혼한 부부가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한 것은 맞벌이를 하면서도 집세조차 내기 버거운 현실 때문이었다. 루이즈는 “남편은 처음에 '아무 것도 없는 사막에 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며 이사를 반대했다”며 “하지만 내 집이 없이는 커나가는 아이들 교육도 시키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모험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1960년대 말 페루는 '혼돈의 땅'이었다. 온 나라에서 빈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몰려들면서, 국토 면적의 3%인 수도 리마에 전체 인구의 30%가 몰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쿠바 혁명과 칠레 아옌데 정권의 등장은 사회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했고, 곳곳에서 빈민들이 부유층의 땅을 무단 점유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비자 엘 살바도르의 시작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1971년 4월28일 약 80가구의 빈민들이 현 비자 엘 살바도르 외곽 팜믈로나 지역의 부유층 거주지 주변에 막대기와 짚으로 간이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불과 닷새 만인 5월3일엔 몰려든 빈민들이 9천 여 가구로 늘어났다. 부유층 주민들은 ‘프로비시안’(페루 북부 고원지대 출신 빈민들)과 함께 살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고, 경찰력이 동원되면서 충돌이 벌어져 사상자가 속출했다.


결국 가톨릭 교회가 중재에 나섰고, 당시 군사정권은 5월11일 군용 트럭 50대를 동원해 사유지를 침범한 주민들을 실어 사막의 버려진 땅 '오야다' 외곽으로 이주시켰다. 이름도 없던 땅에 도착한 주민들은 이틀 만에 첫 모임을 열어 자체 순찰대를 구성했고, 20여일 만에 주민총회를 열어 지역자치위원회(CUAVES)를 조직했다. 새 공동체의 이름은 교회의 제안에 따라 ‘비자 엘 살바도르’(구원의 도시)로 정해졌다.

“밤엔 지독히 추웠고, 낮엔 참기 힘들 정도로 무더웠다. 일교차와 모래 먼지 때문에 호흡기 질환에 걸려 숨진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갓 6살이 된 맏이부터 생후 5개월째인 막내까지 5남매를 이끌고 황무지를 찾아 들어온 파즈와 루이즈는 우선 집부터 지어야 했다. 짚단을 엮어 천막을 쳤고, 나무를 주워 기둥을 삼았다. 헌 옷과 짚을 엮어 아이들 방에 칸막이도 해줬다. 일터로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3~4km를 걸어가 버스를 타야 했고, 식료품은 리마에서 구입해 들여와야 했다. 전기와 물도 없고 언제나 모래먼지가 가득한데다 날씨마저 험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부를 사막에 붙잡아 둔 것은 ‘미아 카사’(내 집)의 꿈이었다.

“지붕도 없이 짚단을 엮어 만든 천막이었지만, 여기가 내 집이었다. 힘들고 고달프지만 떠날 수는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무엇이든 해야 했고, 혼자서는 불가능했기에 이웃과 함께 해야 했다. 물이 부족하면 급수차 증원을 요구했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학교 설치를 요구하며 수십㎞씩 걸어가 시위를 벌였다. 주중엔 일터에서 가족을 위해 일을 했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공동체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파즈는 주거확보위원장으로,루이즈는 여성위원장으로 주민자치운동에도 열심을 냈다.

1972년 초엔 첫 의료시설인 '산 호세 진료소'를 세웠고, 같은 해 6월엔 비자 엘 살바도르에서 리마 북부 아초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버스노선이 생겨났다. 1975년 12월25일 성탄절 밤엔 4년 여를 싸운 끝에 전기가 들어왔다. 파즈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었고, 하루가 다르게 동네가 바뀌었다”며 “노력의 성과가 눈에 보였기때문에 정말이지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말했다.

이주 초기 무시로 일관하던 중앙 정부도 결국 1983년 비자 엘 살바도르를 수도권 리마 주의 공식 시로 승격시키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침입’이 시작된 지 34년 여가 흐른 지금 비자 엘 살바도르는 6만 여 가구 40만 인구를 가진 도시로 성장해있다. 그러는 사이 파즈와 루이즈 부부는 5남매를 더 낳았고, 그 자녀들이 결혼해 19명의 손자를 뒀다. 여유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벽돌을 사다 쌓아올린 집은 어느새 번듯한 2층집으로 바뀌어 있다. 늙은 부부는 '구원의 도시'가 자랑할 만한 성공사례다.

비자 엘 살바도르 제3섹터 29그룹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구역이다. 나무기둥과 버려진 장판, 판넬로 이어 붙인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지은 집들은 영락없는 초기 비자 엘 살바도르의 모습을 닮아있다. 전기와 물도 없고, 하수도를 비롯한 위생시설도 전무하다. 정화조도 없이 땅을 파고 짚을 엮어 둥그렇게 벽을 만든 간이 화장실은 4가구가 1곳씩을 나눠 쓰고 있다. 북부 피우다 출신이라는 로피노 이토리카가(42) 주민대표는 “16개 블록으로 나뉘어 606가구 4천 여명이 살고 있지만, 시 정부는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페루 수도 리마 남쪽 사막의 모래언덕 위에 건설된 ‘비자 엘살바도르’ 중심부에 위치한 산업단지 내 상가 모습. 이곳에서 생산된 여러 용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비자 엘살바도르/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1999년 1월30일 새벽녘 시장이 들어서기로 돼 있던 이곳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침입’해 들어왔다. ‘정착 2세대’ 제니 치로케 코레암(30)도 그 가운데 1명이다. 페루 남부 카니에테 출신인 코레암의 부모는 일자리와 자녀 교육을 위해 지난 1977년 비자 엘 살바도르 제6섹터 6그룹으로 이주해왔다. 그는 “결혼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기가 어려워졌다"며 "고민 끝에 빈 땅을 찾아 집을 짓고 새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밤의 한기와 낮의 열기로 힘겨웠지만, 이웃과 함께 어려움을 풀어 나가고 있는 것은 정착 1세대에게서 얻는 교훈이다. 1982년 시 정부 출범과 함께 공동체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다른 구역에 비해 새롭게 구성된 자치조직은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코레암은 자치단체 부대표이자 위생담당으로 활동하고 있고, 요리사인 그의 남편은 주말이면 공동체 활동에 나선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마련한다.

“내가 15살 때 벽돌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앞으로 3년 안에 나도 벽돌집을 완성하고 싶다.”

18살에 결혼한 그는 12살 난 딸이 있다. 이미 조금씩 벽돌로 바뀌고 있는 코레암의 집이 그의 꿈 대로 3년 안에 완성된다면, 그의 딸도 15살에 벽돌 집에서 살기 시작할 것이다. 가혹한 빈곤의 악순환은 되풀이 되고 있지만, 이를 끊어내려는 노력도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거기에 ‘구원의 도시’ 비자 엘 살바도르의 미래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비자 엘 살바도르/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도시건설 신화’의 주춧돌 지역자치위

주민 대표자가 가려운 곳 쓱쓱
일자리 위해 창업도 적극 지원

지역자치위원회 구성

비자 엘 살바도르 ‘신화’의 견인차 노릇을 한 것은 정착 초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지역자치위원회(CUAVES)다. 지금도 도시 행정구역의 기본 단위로 남아있는 자치위원회는 주민들의 자발적 의사소통 기구이자, 공동체의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집행 기구였다.

정착 초기 3개의 섹터에서 시작한 비자 엘 살바도르는 현재 모두 10개의 섹터로 이뤄져 있다. 각 섹터는 다시 그룹으로 나뉘는 데, 섹터의 크기에 따라 9~20개의 그룹을 거느리고 있다. 각 그룹의 하부 조직으로 16개의 블록이 있고, 각 블록마다 24가구가 들어서 있다. 각 가구마다 1~2 가정이 살고 있다. 모든 섹터마다 그 중심부에 공원과 맞벌이 부부를 위한 유치원, 그리고 자치위원회 모임장소가 조성돼 있는 것도 비자 엘 살바도르 만의 특징이다.

각 블록은 2년에 한 차례씩 총회를 열어 5명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이들은 9명의 그룹 대표자를 뽑는다. 이들은 다시 9명의 섹터 대표자를 선출하게 된다. 이렇게 선출된 10개 섹터의 90명의 대표자가 비자 엘 살바도르의 자치를 책임진 지역자치위원회를 구성하며, 자치위원회는 지난 1983년 시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도시의 모든 의사결정을 책임져왔다.

최근 주춤한 상태지만 시 정부 출범 초기만 해도 자치위원회는 적극적인 시정 개입으로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특히 자치위원회의 토론을 통해 결정된 공동체의 요구사항을 시 정부가 예산 편성 과정에 반영하는 ‘참여 예산제도’란 독특한 문화를 낳기도 했다. 지난 1987년 조성되기 시작해 현재 비자 엘 살바도르 경제의 등뼈 구실을 하고 있는 ‘산업단지’는 공동체의 요구를 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룬 성과로 꼽힌다.

비자 엘 살바도르 시내 중심부에 자리한 산업단지는 자치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시 정부가 입주 업체에 토지를 무상으로 내주면서 시작됐다. 창업을 원하는 주민들에겐 시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방식으로 투자를 유도해 단기간에 성과를 높였다. 현재 식품, 공예, 신발, 의류, 목재, 금속, 주물 등 7개 업종에 걸쳐 모두 1200여 중소업체가 입주해 있는 산업단지는 1만5천 여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산업단지 고용인력의 90% 이상이 비자 엘 살바도르 주민들이다.

비자 엘 살바도르/정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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