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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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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교육개혁 깃발
우고 차베스(51)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지 6일로 7년이 됐다.그동안 차베스 대통령은 석유자원을 무기로 한 노골적인 반미정책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향한 거침없는 독설로, 지구촌에서 새로운 반미의 기수로 자리를 굳혔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가장 골치아픈 상대 가운데 하나다.
토지 무상분배·무상교육 늘려 인기
풍부한 석유 무기로 반미노선 걸어
“유가 하락땐 잠재된 문제 폭발” 지적도
그러나 중남미로 눈을 돌리면 사정은 다르다. 우선 국내에서 인기가 높다. ‘21세기 새 사회주의’ 기치 아래 펼치는 정책들이 대중들에게 먹혀들고 있기 때문이다. 메스티조(원주민과 백인의 혼혈) 출신인 그에 대한 지지율은 빈민을 중심으로 70%에 이른다. 이웃나라에서도 우호적인 곳이 더 많다. 중남미에서 차베스 인기는 2000년대 초반 혜성 같이 등장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을 훨씬 웃돈다.
총체적 개혁정책=차베스가 집권할 당시 외채가 국내총생산(GDP)의 60%, 인플레가 연 50%, 실업률이 20%, 빈곤층이 84%를 넘는 등 베네수엘라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런 악조건에서 그는 신자유주의를 폐기하고 사회주의를 채택했다.
그는 우선 세제·금융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49개 개혁법안을 마련했다. 개혁의 물적 토대로 삼은 것이 석유다. 이를 위해 그는 국영 석유기업인 페데베사(PDVSA)를 자신의 측근을 내세워 장악했다. 석유는 베네수엘라 전체 수출의 80%를 차지한다.
그는 이를 무기로 토지개혁에 힘을 쏟았다. 놀리고 있거나 정당한 소유자를 가릴 수 없는 토지를 유상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것이다. 2004년 말 현재 가구당 11.5㏊씩 모두 200만㏊의 토지 재분배가 이뤄졌다. 올해도 200만㏊에 대해 재분배가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농업생산량이 국내총생산의 5%에서 6%로 증가했다. 도시에서도 새로운 토지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바리오’라는 슬럼지역에 사는 국민들은 스스로 집을 지을 경우 소유권을 인정받고 있다.
개혁정책의 다른 축은 교육이다. 빈곤층 무상교육 확대와 영유아 보육시설 확충이 핵심이다. 이에 따라 1백만명의 빈곤층 어린이가 무료 교육을 받고 있다. 서민 의료사업은 쿠바로부터 의사 1만여명의 지원을 받았다. 도시 영세민을 위해 싼 값에 생필품을 파는 국영 슈퍼마켓도 운영한다.
국유화도 빼놓을 수 없다. 베네수엘라는 최근 외국계 회사들의 모든 광물 채굴권을 취소하고 신규 허가도 불허하는 광업 국유화 방침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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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유가가 급등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아연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던 경제는 2004년 16%의 성장률을 보였다. 야권은 차베스와 2004년 8월 국민소환을 위한 투표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58% 대 42%로 참패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사회주의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에서 기업의 탈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항공 등 여러 분야에서 의욕적인 투자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개혁정책이 정착됐다고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유가가 떨어질 경우 잠재해 있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폭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4년 소환투표 승리 이후 베네수엘라는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보이고 있다. 국민소환 이후 야당은 분열상태에 있으며 4일 총선에서도 약세를 가리기 위해 선거 보이콧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총파업 이후 우파 노조도 와해된 상태여서 차베스가 내년 대선에서도 승리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김학준 기자, 외신종합 kimhj@hani.co.kr
페루 혁명에 감명 공수부대장 때 쿠데타 출감 뒤 정치조직 결성
차베스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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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는 1922년 전 대통령과 주지사를 살해해 ‘마이산타’로 불리던 유명한 반군 페드로 페레스 델가도의 증손자이기도 하다. 대지주였던 델가도는 반군 활동으로 땅을 빼앗겼으나 차베스가 대통령이 된 뒤 다시 몰수했다.
그는 6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전기와 수돗물이 없는 시골집에서 살았다. 그가 살던 시골마을은 베네수엘라의 도시를 살찌우기 시작한 석유가 풍부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에 찌든 곳이었다. 그의 부모는 교사의 월급으로 자녀들 키우기에는 벅찼지만 가난을 벗고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는 부모로부터 뒤에 유용하게 쓰인 교수· 논리 기술과 함께 웅변·수사의 기초를 배웠다.
차베스가 사회주의를 접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다. 친한 친구였던 호세 루이스의 아들 형제 집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관한 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17살이던 차베스는 돈이 없어 공수부대에 들어가고, 이어 사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된다.
차베스는 74년 생도들과 젊은 병사들과 함께 페루를 방문해 급진 좌파인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대통령을 만난다. 알바라도는 그에게 <페루 민족혁명>이란 책을 줬는데, 차베스는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듬해 사관학교를 졸업한 차베스는 17년 동안의 군대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권력의 꿈을 본격적으로 다지기 시작한 해는 83년이다. 이 해는 베네수엘라의 영웅 볼리바르의 탄생 200돌이 되는 해였다. 그 해에 그는 ‘혁명 볼리바르 운동-200(MBR-200)’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목표는 볼리바르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91년 공수부대장에 오른 그는 이듬해 4월 볼리바르 운동 대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패한 뒤 2년간 수감생활을 하는 시련을 겪었다. 출감 뒤 그는 볼리바르 운동을 정치조직인 ‘제5공화국 운동(MVR)’으로 재건해 제도정치권에 뛰어들어 결국 1998년 ‘대권’을 거머쥐었다.
김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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