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준 의장 18년 맡아 세계경제 화려한 지휘
블랙먼데이·신흥국 위기·닷컴버블 등 적절대응
저금리 고집 ‘주가·집값 과열’ 비판도 만만찮아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이사회(FRB) 의장이 이달 31일 현직에서 물러난다. 1987년 8월 이후 18년 6개월 동안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흐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온 그린스펀이 중앙은행인 연준을 떠나 이제 ‘야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후임자는 벤 버냉키 대통령 경제자문회의 의장으로 상원의 인준 절차를 밟고 있다. 벌써 한편에서는 그린스펀의 퇴임 이후 활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의 아내이자 <엔비시>(NBC)의 유명한 기자인 앤드리아 미첼은 일단 경제 관련 책을 쓰는 게 우선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이에 필요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중요한 공공정책에 관해 자유로운 처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힐 계획이라고 한다. 그린스펀이 마음만 먹으면 1회 강연에 연준 의장 연봉(18만달러)과 맞먹는 15만달러를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3월에 80살이 되지만 그린스펀은 연준 시절 못지 않게 여전히 또다른 ‘현역’의 자리를 지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린스펀의 연준 시절은 화려했다. 어떤 전임자들보다 전문가들과 매스컴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미국 안팎에서 쏟아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경제지도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 ‘경제 대통령’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과 영국 기사작위, 프랑스 뢰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임기 말이 가까워지면서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공적’ 못지 않게 ‘과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린스펀 시대’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그를 찬미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더 많다. 이들은 그린스펀이 1987년 10월 미국 주가폭락(일명 ‘블랙먼데이’), 97~98년 한국 등 신흥시장 위기와 러시아 채무불이행(디폴트), 2000~01년 주가폭락(닷컴거품) 사태, 9·11 동시테러 파장 등에 적절히 대처한 점을 든다. 사실 이 중 한가지 사태라도 어슬프게 대응했다면 미국 경제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었다. 자칫 금융시장이 붕괴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이 90년대 후반 미국 경제의 생산성 증대 현상을 일찌감치 확인하고 공론화한 점 등도 큰 공이라고 평가한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지 않고서도 경제성장의 속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에 경기확장에 제동을 걸 필요가 없어지고 실업률을 줄일 수 있다. 그린스펀이 이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정책으로 뒷받침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린스펀 비판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그린스펀이 90년대 말의 닷컴주식을 중심으로 한 주식시장 거품을 정도 이상으로 키웠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주택시장 거품을 만드는 데 큰몫을 했다고 본다. 주가거품의 경우 애초 96년 말에는 ‘비이성적 과열’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거품 가능성을 경고하다가 태도를 바꿔 결과적으로 투자자와 시장을 투기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주택시장도 2004년 중반 이전까지 저금리 정책을 지나치게 고수한 탓에 거품이 만들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들은 그린스펀이 200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감세정책을 적극 지지한 데 대해서도 재정적자 등을 키우도록 했다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두 가지 다 그린스펀으로서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미국 경제가 불균형 요소들이 터져나와 경착륙하는 일이 빚어진다면 그린스펀에 대한 평가는 좀더 부정적인 쪽으로 바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경 선임기자klee@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