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미국 와서 월마트니 대형 슈퍼마켓을 다녀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런 상술 또는 판매전략의 원조는 미국이구나'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국의 할인매장들은 한국 할인매장의 큰 형님 뻘 되는 것 같습니다.
매장을 지나다 보면 곳곳에 "free"라고 붙어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공짜라는 뜻인데요. 자세히 살펴보면 "free" 앞에 한마디가 더 붙어 있습니다. "buy one get one" 즉 하나 사면 다른 하나는 공짜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물건이 별 필요없던 사람들도 이걸 보면, '좋은 기회인데, 지금 당장은 필요없지만 어차피 나중에 필요할 물건이니 쌀 때 사두어야지"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원래 한 개를 살까 말까 했던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고 사는 건 물론이구요.
그리고 무슨 MVP카드라는 것을 만들어줍니다. 누구에게나 만들어주는 카드인데요. 일부 품목은 가격표시가 2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가격은 얼마인데 MVP카드가 있으면 할인해서 얼마에 준다는 뜻이지요. 사실 애들 장난 같은 겁니다. 그 매장에 오는 사람 중에서 그 카드 없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마치 내가 특별 할인을 받는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거죠. 영수증에도 "당신은 오늘 MVP카드를 써서 얼마를 절약했습니다" 하고 적혀 있습니다.
추수감사절 다음날은 대부분의 상점이 할인 행사를 합니다. 일년 중에 가장 큰 할인 행사라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쇼핑을 이때 많이 한다고 합니다. 이 날은 인기 있는 매장 같은 곳은 새벽 4,5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이니까요. 저도 다른 한국사람 한 분과 이런 문화를 체험해 본다는 미명하에 새벽 5시에 월마트에 갔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가 어릴때 가끔 하시던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공부를 이런 정성으로 해라"^^ 다행히 추운 바깥에는 줄이 없었습니다만 안에 들어가니 전단지 광고를 대대적으로 한 휴대용 게임기 같은 일부 인기품목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날 쇼핑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정말 싼 품목은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조금씩 할인을 해주던지 할인을 안 해주던지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안에 들어가면 사게 됩니다. 평소의 가격보다는 조금씩 싸기도 하거니와 여러 사람이 몰리는 품목은 서로 경쟁적으로 집어 들게 되거든요.
이런 쇼핑에 충동구매가 많다는 것은 추수감사절 할인행사 다음주에 좀 큰 옷이 있어서 바꾸려고 갔을 때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쇼핑카트 가득, 환불할 물건을 실은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더군요. 사 가지고 와서 집에서 얼마나 후회들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슬며시 웃음이 났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알면서도 제 자신이 이런 상술에 현혹되고 있다는 겁니다. "buy one get one"이 붙어 있는 물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이 물건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거든요. 이 사람들의 상술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실제로는 내가 돈을 쓰고 있으면서도 내가 마치 돈을 절약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한 물건만을 싼 가격에 산다면 돈을 절약하는 게 맞지요. 그러나 저의 경우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경우는 가격이 싸다는 핑계로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사게 되는 게 다반사입니다. 돈을 쓰면서도 돈을 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기술. 이게 바로 미국 대형매장들의 핵심기술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와 함께 걸어서 재래시장에 다녔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소비자로서 보여주셨던 모습은 제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고 지금까지도 제 소비습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쇼핑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대형할인매장, 백화점과 재래시장은 경우가 완전히 달라서 옛날 어머니들의 장보기를 현재의 쇼핑문화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 때 기억을 한 번 되살려 봅니다.
우선 매일 시장에 다니신 것이 아니고 며칠에 한 번 정도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며칠 동안 살림하시면서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을 기억해 두셨다가 한 번 시장 갈 때 사오셨지요. 그리고 항상 단골가게나 단골노점이 있었죠. 예를 들어 어물전이 많이 있었지만 항상 생선을 사는 어물전은 정해져 있었고 생선장수 아주머니와 오늘의 생선 품질과 가격에 대해 토의를 한 후 단골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값을 흥정한 후 생선을 사셨습니다.
그 때 저는 장보기에 있어서 소비자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빅카드는 그냥 가려는 액션이라는 것을 배웠지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번 장보기에 들고 나가시는 돈이 항상 제한되어 있어서 신용카드도 없고 현금지급기도 없던 시절에는 이 액수 이상으로는 구매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선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가격과 품질을 비교한 후(즉 생선이 싸면 생선을 사고, 야채가 싸면 야채를 사는 식이지요) 한번 봐두었던 가게나 노점을 다시 찾아 사곤 하셨습니다.
또한 저와 동생이 따라 가면 으레 군것질거리를 사달라고 조르기 마련인데 제 기억으로는 세 번에 한번 정도 성공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서 주신 과업(마늘까기 등)을 수행해야 했구요. 돌이켜보면 그 때의 어머니들은 현명한 소비자였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명해야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끔, 쇼핑을 왕창 하다보면 옛날 어머니께서 장보던 것이 생각나서 ‘이걸 어머니가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풍족해졌습니다. 그 덕에 소비도 많이 늘었구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당한 소비가 경제의 윤활유가 되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장보기 지혜를 오늘의 쇼핑에 되살려(어디서 많이 듣던 귀절이네요) 최첨단 판매기술에 대응하는 최첨단 ‘쇼핑의 기술’을 연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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