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역사가가 오늘의 사건을 두고 문명의 충돌이라고 기록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역사적 사실이 되겠는가? 표면의 출렁거리는 이벤트는 분명 문명의 충돌처럼 보여 진다. 그러나 역사란 바다와 같은 것이라는 아날 학파의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관에 귀를 기울인다면 지금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단순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표면의 출렁거림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시대적 이벤트의 이면에 들어 있는 더 깊은 의미, 즉 역사의 의미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실의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과 서구사회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충돌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건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변방의 저항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서구의 변방 침탈은 군사적인 형태이든, 경제적인 형태이든 계속되어 왔다. 19세기가 군사적 서세동점의 시기였다면 20세기는 경제적 서세동점의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서구 사회는 인류의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세계 열국들을 여하한의 수단과 논리로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구문화는 그 외의 문화들과의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 현상을 두고 문명의 충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문명의 충돌이 역사적 당위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일에 서구 문명이 다른 문명사회를 강점하지 않고 문명을 교류했더라면 문명의 충돌 같은 건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문명이 서로 공존하는 교류를 통한 세계의 공영을 목표로 한 세계화였다면 왜 문명 간의 충돌이 발생했겠는가? 문명의 충돌이 일어난 건 서구사회의 문화 우월주의가 낳은 비합리적인 역사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헌팅톤은 마치 문명의 충돌이 역사적 당위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20세기는 문명의 공존의 세기가 되었어야 했고, 21세기는 세계 공동체의 공영의 세기가 되었어야 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볼 때는 당위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충돌을 역사적 당위처럼 예언한 것은 무얼 말하는가? 그건 미국의 세계 지배의 당위를 역설하기 위한 역사 해석과 전망에 불과한 것이다. 이 오류가 당위처럼 받아들여져 우리 사회에서도 문명의 충돌을 21세기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숨어 있는 미국중심주의의 사상적 편린은 간과한 채 말이다. 사실 새뮤얼 헌팅톤이 미국의 애국주의자인 것은 몇몇 책들을 통해 한국 사회에도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지난 2004년에 출간된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Who are we?)이 그 실체를 알려주는 대표작이다. 헌팅톤은 “미국의 신조”에 충실한 작가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 이해와 해석에는 미국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편향 때문에 그는 결코 21세기 예언가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설인 “문명의 충돌”이 우리 아이들의 의식에까지 심어져 있다는 것이 정말 무섭다. 문명의 충돌은 서구의 문화 우월주의가 낳은 부정적 사회현상일 뿐이지 역사적 당위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0세기는 문명의 공존하는 세기가 되었어야 했다. 그 역사적 당위를 서구 사회가 스스로의 권력과 교만으로 파괴한 것이다. 그 불합리한 역사적 상황에 직면한 약자들의 저항이 결국 문명의 충돌을 부른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이슬람의 시위를 바라보면서 약자의 저항과 강자의 점잔을 보게 된다. 약자의 저항은 자주 폭력과 무질서로 나타나고, 강자의 점잔은 겸양과 질서유지로 나타난다. 표면적으로 보면 강자의 점잔은 미덕으로 보여지고, 약자의 저항은 비합리적 행위로 비춰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정의와 사회질서라는 더 궁극적인 가치가 숨어 있다. 강자의 점잔은 사회질서를 내세운다. 그러나 약자의 저항엔 정의 구현이 목표다. 이 두 가치들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는 논할 가치가 없다. 사회 정의가 사회 질서에 앞서는 것이다. 결국 강자는 이차적 가치를 내세워 일차적 가치를 무력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약자의 저항은 더욱 더 거세지게 되고 문명의 충돌의 악순환은 반복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문명의 충돌이 마치 역사의 당위인 것처럼 설명되어진다. 헌팅톤의 판단은 이런 표면적 현상들에 대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 표면적인 설명으로 이차적 가치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저항을 보고 있으면 똑똑한 악당과 어눌한 시민을 보는 것 같다. 똑똑한 악당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고, 의인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어눌한 시민들은 착하게 살면서도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기 일상이다. 그러나 사회 정의가 살아 있는 한 악당과 시민은 반드시 구별된다. 사회 정의를 무시하면 언젠가는 공공의 적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당위이다. 오늘날 서구 사회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마법에서 풀려나야 한다. 저들의 국부는 인류의 공영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슬람과 같은 약자의 사회 역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어리석은 전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간디와 같이 사타하그라하의 정신으로 저항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적 당위를 가지고 사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돌하고 있는 양자 간의 변화가 필요하다. 강자는 겸손함으로, 약자는 지혜로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를 올바로 직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성서의 교훈이 오늘 우리 시대의 미국과 이슬람에 필요하다.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공존이라는 역사적 당위를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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