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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시아-수니파 분쟁 배경 |
이라크에서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내전 위기가 고조되면서 이슬람의 두 축을 이루는 시아와 수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시아파는 전세계 무슬림의 15% 정도를 차지하는 소수파다.
이슬람은 서기 680년 이른바 이라크 `카르발라' 전투를 계기로 수니와 시아로 갈라졌다.
카르발라 전투는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제4대 칼리프인 이맘 알리가 암살된 뒤 그의 아들인 후세인이 이슬람 패권을 놓고 시리아 군벌인 무아위야 가문과 벌인 싸움이다.
후세인은 이 전투에서 생포돼 참수됐다.
그후 이슬람 공동체는 마호메트의 후손 중에서 칼리프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인 시아(알리의 추종자라는 뜻)파와 혈통에 관계없이 통치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수니파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니파는 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 주류파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란과 마찬가지로 이라크는 시아파가 주류이다. 전체 인구 2천600만명 중 약 60%가 시아 무슬림이고, 나머지가 쿠르드족(15∼20%)과 아랍족(15%) 수니로 알려져 있다.
인구구성비로는 시아파가 압도적이지만 이라크에선 주로 수니파가 득세했다.
입헌군주제가 성립된 1920년대부터 공화정이 들어선 1958년까지 23개의 내각이 출범했지만 시아파 주도 내각은 4개에 그쳤다.
또 수니계인 사담 후세인이 1979년 대통령이 된 뒤 23년여동안 통치하면서 시아파는 정치소외 세력으로서의 설움을 혹독하게 겪었다.
시아파는 1991년 걸프전 직후에 후세인 정권의 장악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해 남부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후세인의 공화국수비대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이는 시아파와 후세인의 수니파 정권 간에 사이가 더욱 나빠지는 계기가 됐다.
박해를 피해 해외 망명길에 오른 수많은 시아파 인사들은 후세인 정권 축출 운동을 주도해 결과적으로 미국의 침공을 유도하는데 기여했다.
후세인 정권이 2003년 3월 미국의 공격을 받아 무너진 뒤 이라크 시아파는 건국 이후 80여년만에 처음으로 완벽한 정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지만 오랜 기간 권력을 독점해온 수니파의 저항으로 고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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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 특파원 parksj@yna.co.kr (카이로=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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