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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반군에게 양팔을 잘린 알 주수 자로카(오른쪽)가 한 동료 부상자와 함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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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현장을 가다] 서아프리카
11년 전쟁 상처 아물지 않는 시에라리온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나라 이름은 ‘사자의 산’이라는 포르투갈말에서 왔다. 그러나 이곳은 지난 1991~2002년 사자의 포효 대신 총포 소리로 뒤덮힌 내전의 땅이었다. 시에라리온 사람들은 아직도 내전에 잘린 상처를 핥으며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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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 시내에 남아있는 옛 성벽 통로에 살고있는 젊은 실업자들. 이 통로는 과거 노예무역이 이뤄지던 시절 노예를 성밖에 정박한 배에 태우러 호송하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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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 잘린 7천명 등 모두가 희생자
150만명 “당장 먹을 식량 없어요”
국민 70% 빈곤층…“한국정부서 도와달라” 어린 나이에 전쟁에 가담해야 했던 소년병들의 상처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들은 전투에 내몰린 것은 물론이고 포로의 사지를 자르거나 산 채로 불태우는 등의 잔혹행위도 강요당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재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다. 그러나 전후의 시에라리온 사회에 이들을 돌볼 여력은 적어 보인다. 소년병을 비롯한 전투원 출신들에겐 심리치료가 필수적인데 나라 전체에 정신과 의사는 단 한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단적인 예다. 국제이주기구 프리타운사무소의 앤드류 초가 소장은 “정신과 의사를 1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게 우리의 목표”라며 “그래봐야 의사 한 사람이 대략 500명 가량을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후 처리를 위해 구성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생계·의료·교육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하도록 권고했지만 시에라리온 정부는 “가용 자원과 국제사회의 도움을 감안해 권고를 이행하겠다”는 태도다. 한마디로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에라리온의 경제는 내전으로 깊은 내상을 입었다. 수도 프리타운의 거리는 젊은 실업자들과, 구걸하거나 물건을 파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프리타운을 둘러싼 오레올산 기슭에는 움막집에서 마치 걸레 같은 옷을 걸친 아이들이 흙바닥을 기며 놀고 있었다. 시내 빈민가는 마치 6·25전쟁 직후의 사진을 보는 듯했다. 국제이주기구의 에디 카마라는 “일주일 동안 물만 먹으며 일하는 사람도 봤고,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가 돌아갈 차비가 없어 거지로 전락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실태조사 보고서는 “시에라리온 국민의 26%인 150만명 가량이 굶주릴 정도의 빈곤을 겪고 있으며 전반적인 빈곤층은 70%에 이른다”고 밝혔다. 유엔통합사무소의 베네딕트 사노는 “높은 실업률과 낮은 교육수혜율은 내전 당시 반군 모집을 쉽게 한 요인이었다”며 “전쟁의 근본 원인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셈”이라고 말했다. 초가 소장은 “빈곤의 해결 없이 평화는 없다”며 국제사회의 지원과 투자를 요청했다. 자로카는 “우리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애원했다. 참혹한 전쟁에 팔·다리를 잃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다친 시에라리온 사람들을 향해, 빈곤은 사자보다 더 포악하게 덮쳐들고 있었다.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같은 기본적인 생존수단을 걸고 싸우는 중”이라는 국제이주기구 요원 카트린 그린우드의 말처럼, ‘사자의 산’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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