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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1 17:32 수정 : 2005.08.01 17:32

1일 사망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국왕은 사우디 근대화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3년 이븐 사우드의 40여 명의 아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 파드 국왕은 전 국왕 파이살의 이복동생으로 1982년 6월 사우디의 5번째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이전 사우디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강경파를 국교로 삼은 나라의 왕족인만큼 해외 유학이나 특별한 서구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파드 국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항구, 공장, 도로 등에서 볼 수 있듯 사우디에서 그는 23년간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며 친미 노선과 전통 이슬람교 신앙 사 이에서 균형잡힌 외교정책을 구사했다.

그는 특히 건강이 악화돼 후계자에 대한 권력이양 구도가 제기되기전까지 전세계 석유보유량의 25%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산유국의 석유정책을 한손에 쥐고 세계 석유가격을 좌지우지 해왔다.

파드 국왕은 또 보수적인 이슬람 왕정을 이끌면서도 줄곧 친미 정책을 견지해왔는데 지속적인 대규모 석유공급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지원을 받아왔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테러와 전쟁으로 바람잘날 없는 중동 지역에서 사우디가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파드 국왕의 이같은 적절한 친미정책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는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사우디에 대규모 미군과 다국적군의 주둔을 허용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를 야기했다.


그는 이슬람의 신성한 땅에서 미군을 추방하라는 오사마 빈 라덴의 요구를 무시했고 이를 계기로 테러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사우디는 95년 수도 리야드 테러를 시작으로 알-카에다 공격의 주요 타깃이 됐다.

파드 국왕은 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종종 기억력과 집중력을 거의 상실, 휠체어를 타거나 지팡이를 짚고 나와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올들어 지난 5월 건강이 악화되면서 병원에 입원했고 왕실에서는 이례적으로 입원 사실을 알리고 국민에게 회복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 건강이 위중한 상태가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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