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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19 18:28 수정 : 2005.10.20 02:25

사담 후세인 특별재판 시작

판사 질문에 “점령군 주도 법정 불법” 답변 거부
미국지원 받은 특별재판소 ‘공정성’ 논란 불가피
‘두자일 학살 혐의’ 첫 적용…유죄입증 쉽기 때문

‘승자의 재판’인가, ‘정의의 심판’인가?

‘아랍세계의 맹주’를 꿈꾸며 미국에 맞섰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 19일 법정에 서면서 다시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시엔엔> 등을 통해 녹화방송된 법정 장면을 보면, 예정보다 2시간쯤 늦은 이날 정오께 재판이 시작되자 후세인은 이전보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흰 쇠창살 안에 마련된 피고석으로 들어섰다. 그는 판사의 질문에 대답하길 거부하고, “당신들을 세운 그 기구(이라크 정부)의 권위나 (미국의) 침략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이라크 대통령으로서 헌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며 재판정의 권위에 도전했다. 그는 자신은 “무죄”라고 강조했으며, 판사의 모든 질문에 이견을 달면서 재판 진행을 막았다. 후세인의 측근인 다른 피고 7명도 모두 무죄를 주장했다.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이끌고 있는 이라크 정부는 이번 재판을 통해 비밀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30만명이 넘는 민간인을 살해한 후세인 독재정권을 단죄하고 이라크가 새출발한다는 이미지를 보여주려 한다. 미국으로선 후세인의 잔인함을 다시 드러내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이 주도해 세운 특별재판소에서 후세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을지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유엔이 주도하는 국제재판소에서 그를 재판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날 재판이 열린 바그다드 그린존의 특별법정은 과거 바트당 본부 건물 안에 있는, 후세인이 외국 지도자들한테 받은 선물을 보관하던 장소다. 법정은 방탄유리로 둘러싸였으며, 취재진이나 방청객들은 유리창 너머로 재판을 지켜봤다.


엇갈리는 민심=이라크인들은 이날 아침 일찍부터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재판 장면이 방송되기를 기다렸다.

10여년 전 형이 비밀경찰에 끌려간 뒤 실종됐다는 모하메드 나짐은 <에이피통신>에 “사담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싶다”며 “그에겐 재판도 필요 없고, 단두대만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바그다드 시아파 거주지 카지미야에 사는 건설노동자인 살만 샤난은 이 재판을 보기 위해 휴가를 냈다고 말했다. 후세인 치하에서 투옥됐던 그는 후세인의 처형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과 혼란에 찌든 이라크 현실을 들어 재판에 냉소적인 목소리도 많다. 시아파 화학자인 타레흐 알사하브는 “물도, 전기도, 안전도 없다. 후세인이 권좌에 있다면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재판은 권력을 빼앗긴 수니파를 더욱 자극해 종파간 갈등에 기름을 부을 가능성도 있다. 반미 저항세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후세인 지지자들은 재판을 막기 위해 공세를 강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16일 바트당 명의로 인터넷에 올라온 성명은 “점령자에게 죽음의 공격으로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촉구했다. 19일에는 법정이 있는 그린존 근처에서 박격포탄이 터지는 등 저항공격이 계속됐다.

어떻게 재판하나?=이날 시작된 재판에서 맨 처음으로 다뤄진 것은 두자일 학살 혐의다. 이는 이 사건의 증거가 분명히 남아 있어 짧은 시간에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일 이라크 텔레비전에서는 1982년 당시 후세인이 두자일을 방문하는 모습 등이 집중 방영됐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희생자도 훨씬 많았던, 화학무기를 사용한 쿠르드족 수십만명 집단학살 사건이나 시아파 반란 진압, 비밀경찰을 동원한 잔인한 정적 제거 등에 대한 재판은 앞으로 잇따라 열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떤 재판이 열릴지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다. 1980년 이라크의 침공을 받았던 이란 정부도 18일 후세인에 대한 별도의 기소장을 이라크 정부에 발송했다고 밝혔다.

시아파 지도자들은 두자일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사형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어 더 이상의 재판은 필요없다고 밝히고 있다. 쿠르드족인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은 “후세인이 쿠르드족 학살(안팔 대학살)을 직접 명령했다고 고백했다”며 이에 대한 재판도 진행할 뜻을 밝히고 있다. 두자일 학살 혐의에 대한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면 사형 선고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고, 후세인은 항소할 수 있지만 판결이 확정되면 30일 안에 형이 집행된다. 이번 재판에는 이라크 국내법과 국제법이 함께 적용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혁명가…독재자…도망자…피고인

후세인은 누구인가

19일 심판대에 오른 사담 후세인은 24년 간 이라크를 철권으로 통치했다. 젊은 시절 아랍의 통일과 부흥을 꿈꾸며 혁명가의 길에 들어섰던 그는 집권 기간 내내 독재자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미국이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기까지 그는 오랜 기간 석유 이권과 아랍의 세력균형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 은밀한 거래를 했다.

그는 1956년 아랍 사회주의 정당 바트당에 가입하면서 정치적 재능을 드러냈다. 국왕 암살 기도와 쿠데타 실패, 망명, 쿠데타 성공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그는 1979년 드디어 권력을 거머쥔다.

그는 곧바로 ‘아랍 패권’이라는 거대하면서도 위험한 도박을 시도했다. 1980년 이란을 침공하고, 1990년엔 쿠웨이트를 공격했다. 미국은 이란 혁명이 아랍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란과 전쟁에선 그를 지원했으나, 석유 이권이 걸린 쿠웨이트와 전쟁에선 그에게 등을 돌렸다. 전쟁에서 패한 그는 권력을 다잡기 위해 시아파와 쿠르드족을 가혹하게 탄압한다.

2000년 집권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가 문명사회를 공격하기 위해 대량살상무기를 만들고 있다며 공공연히 축출을 시도했다. 미국은 마침내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해 4월 그를 축출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바그다드 북쪽 티크리트의 한 농가이다. 8개월 만에 고아가 돼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그가 2003년 12월 초라한 모습으로 미군에 붙잡힌 곳도 티크리트의 한 농가 지하굴이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두자일 학살’이란?

82년 후세인 암살공격에 한 마을 초토화

이란-이라크전쟁이 한창이던 1982년 7월,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60㎞ 떨어진 두자일을 방문했다. 두자일은 시아파와 수니파가 함께 거주하며 과일 농사를 짓는 여유 있는 농촌 마을이었다.

후세인이 경호원들과 함께 마을로 들어선 지 몇분이 지나 도로 옆 과수원에 숨어 있던 무장세력들이 후세인의 행렬을 공격했다. 두자일에서는 후세인 통치에 반대하는 시아파 정치조직들이 활동해왔다. 시아파 정당인 다와당은 나중에 이 공격을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밝혔다.

곧바로 후세인의 경호원들과 비밀경찰들이 마을을 돌며 젊은이들을 찾아내 학살하기 시작했다. 끌려간 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살해되거나 실종된 사람은 143명이며, 400여명이 체포된 것으로 집계돼 있지만, 주민들은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있다고 말한다.

후세인의 명령에 따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과수원 등과 주택은 철저히 파괴됐고 식수원도 파괴됐다.

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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