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84년 통산장관으로 다시 입각해 내각의 다른 요직을 거치면서 서안 지역 정착촌 확장정책을 추진했고, 98년부터 네타냐후 총리 정부하에서 외무장관을 역임 했다. 샤론은 그러나 네타냐후 총리가 지난 99년 총선에서 패배하자 그해 9월 리쿠드당 당수를 승계해 2001년 2 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를 누르고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총선을 앞둔 2000년 9월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 지역 을 방문해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이스라엘 봉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총리 취임 이후 독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안보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평화안 을 추진해 이스라엘 보수 우익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가자지역을 포기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며, 궁극적으로는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샤론 총리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점령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건설한 정착촌을 38년만에 자진해체하는 위업을 쌓았지만 이로 인해 극우 유대인들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베냐민 네타냐후 전 재무장관이 주도했던 당내 반란을 수습했으나 연정 파트너인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 당수가 당 지도부 선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결국 지난해 11월 21일 30여년간 몸담아온 리쿠드당 탈당을 발표하고 '카디마(전진)'로 명명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그는 신당창당 이후 후속작업에 몰두하다 지난달 18일 뇌졸중 증세로 한차례 입원치료를 받았다. jb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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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총리 누구인가 |
(서울=연합뉴스) 아리엘 샤론(78) 이스라엘 총리는 농부에서 군인으로, 전쟁영웅에서 다시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전쟁에서 승리한 지역에 공격적으로 유대인 정착촌을 세웠지만 더 큰 미래를 위해 이를 파괴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아랍에 오랫동안 양보를 몰랐으나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에 그들 자신의 국가를 세울 영토를 넘겨줬다.
영국 위임통치 시절인 1928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그는 14세에 군에 입대해 지하 군사조직인 '하가나'에서 활동했으며, 이스라엘 건국 직후 아랍권 국가들의 집단 공격으로 시작된 제1차 중동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오늘의 이스라엘 지도를 만들어 놓은 3차 중동전쟁에 참전해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를 차례로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1973년 장군으로 전역한 샤론은 리쿠드당 창당에 참여해 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이던 1982년 레바논에 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메나헴 베긴 당시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고 베이루트에 대한 군사공격을 이끌어 PLO 본부를 튀니지로 망명토록 했다.
이 공격은 이스라엘군 통제하에 있던 베이루트 난민캠프 2곳에서 레바논 기독 교 민병대가 수백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학살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스라엘 법원은 이 양민 학살에 대한 샤론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 그 는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정치생명은 거기서 끝나는 듯 했지만 오뚝이 처 럼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84년 통산장관으로 다시 입각해 내각의 다른 요직을 거치면서 서안 지역 정착촌 확장정책을 추진했고, 98년부터 네타냐후 총리 정부하에서 외무장관을 역임 했다. 샤론은 그러나 네타냐후 총리가 지난 99년 총선에서 패배하자 그해 9월 리쿠드당 당수를 승계해 2001년 2 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를 누르고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총선을 앞둔 2000년 9월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 지역 을 방문해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이스라엘 봉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총리 취임 이후 독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안보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평화안 을 추진해 이스라엘 보수 우익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가자지역을 포기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며, 궁극적으로는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샤론 총리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점령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건설한 정착촌을 38년만에 자진해체하는 위업을 쌓았지만 이로 인해 극우 유대인들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베냐민 네타냐후 전 재무장관이 주도했던 당내 반란을 수습했으나 연정 파트너인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 당수가 당 지도부 선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결국 지난해 11월 21일 30여년간 몸담아온 리쿠드당 탈당을 발표하고 '카디마(전진)'로 명명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그는 신당창당 이후 후속작업에 몰두하다 지난달 18일 뇌졸중 증세로 한차례 입원치료를 받았다. jbt@yna.co.kr
그는 84년 통산장관으로 다시 입각해 내각의 다른 요직을 거치면서 서안 지역 정착촌 확장정책을 추진했고, 98년부터 네타냐후 총리 정부하에서 외무장관을 역임 했다. 샤론은 그러나 네타냐후 총리가 지난 99년 총선에서 패배하자 그해 9월 리쿠드당 당수를 승계해 2001년 2 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를 누르고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총선을 앞둔 2000년 9월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 지역 을 방문해 제2차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이스라엘 봉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총리 취임 이후 독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안보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평화안 을 추진해 이스라엘 보수 우익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가자지역을 포기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며, 궁극적으로는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샤론 총리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을 통해 점령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건설한 정착촌을 38년만에 자진해체하는 위업을 쌓았지만 이로 인해 극우 유대인들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베냐민 네타냐후 전 재무장관이 주도했던 당내 반란을 수습했으나 연정 파트너인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 당수가 당 지도부 선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결국 지난해 11월 21일 30여년간 몸담아온 리쿠드당 탈당을 발표하고 '카디마(전진)'로 명명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그는 신당창당 이후 후속작업에 몰두하다 지난달 18일 뇌졸중 증세로 한차례 입원치료를 받았다. jb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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