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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토르 중심지인 수흐바타르 광장. 몽골 독립영웅 수흐바타르 동상 뒷쪽에는 몽골 건국 800주년을 기념하는 징기스칸 기념관 건설작업이 한창이다. 아래는 전통적인 천막가옥 게르가 주요 주거형태인 울란바토르 교외 마을 풍경. 도시화가 진전되고 있음에도 주민의 60% 이상이 게르에 산다. 울란바토르/권태선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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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골 프로젝트 ‘남 자본·북 노동력’ 구애
경제성은 미지수…미·중·일 진출 각축
[순회특파원이 간다 - 몽골]
몽골은 156만4116㎢(한반도의 약 8배)라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지만, 경작지는 0.76%에 불과하고 2006년 7월 현재 인구는 고작 284만명이다. 남바르 엥흐바야르 몽골 대통령이 총리로 재직하던 2003년 11월 서울을 방문해 동몽골 3개 아이막(몽골의 행정단위)에 대한 남·북한, 몽골 공동개발을 제안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몽골은 경제력도 취약할 뿐 아니라 인력이 태부족해, 자체적으로 개발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엥흐바야르 대통령은 지난 5월 노무현 대통령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도 이 안을 다시 제기했다고 담딘 초크바타르 대통령 외교보좌관이 지난달 29일 밝혔다. 초크바타르 보좌관에 따르면 동몽골 개발계획은 헨티, 도르놋드, 수흐바타르 등 총 28만7천㎢나 되는 3개 아이막을 한국의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으로 공동개발하자는 것이다. 애초 이 논의는 2003년 10월 한국의 동북중아연대와 몽골 정부 사이에서 시작됐다. 제안 내용은 뉴밀레니엄로드 건설과 철도 인프라 구축, 한국식 정착촌 건설, 농축산단지 개발 및 석유·금·은·구리·우라늄 등 지하자원 개발 등이다. 개발 전권과 수십년간 사용권을 한국에 주겠다는 몽골 쪽은 필요하다면 장기간 할양할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라고 동북중아연대 김종복 상임고문은 전한다.
초크바타르 보좌관도 이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동몽골 사업이 지금은 중단된 두만강 개발사업의 첫단추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이 몽골에서 협력해 이 사업을 성공시킬 경우, 동북아 협력이 구두선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일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박진호 몽골주재 한국대사는 몽골 쪽에서 우선 시범농장부터 시작하자고 한다며, 그러나 농업개발의 경제성에 대해선 자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농사를 짓기엔 물이 부족해 연해주나 삼강평원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란다. 또 광산채굴사업도,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옛소련이 이미 개발한 뒤끝이라 얼마나 남아 있을지 낙관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박 대사는 동몽골 개발계획은 단순히 경제성으로만 따질 수 없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강조한다. 러시아의 공군기지가 있던 도르놋드의 초이발산을 포함하는 이 지역은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힘의 공백 상태에 있다.
몽골은 이 지역을 방치할 경우, 중국인들이 들어와 사실상 점유하는 상태가 될 것을 우려해 제3의 세력이 이 지역에 들어와 중국을 견제해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분석한다. 이미 중국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탄광이나 유전을 개발하고 있다. 일본은 울란바토르에서 초이발산까지 몽골로드를 건설중이다. 그렇다면 왜 몽골이 유독 우리에게 이 지역 공동개발을 제안한 것인가? “기본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몽골인들의 호감이 큰 작용을 한 것”이라고 초크바타르 보좌관은 말한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고 이상화하고 있으며, 한국에 체류하는 2만6천여명의 몽골인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한국의 우호세력이다. 또 지식인들의 경우,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두 나라의 처지에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게 베그즈 출룬도르즈 인문대 총장의 분석이다.
울란바토르/권태선 순회특파원
kwonts@hani.co.kr
몽골 경제 현주소
‘통제불능’ 지하경제가 발전 걸림돌
소련 붕괴 이후 민주화의 도정에 들어선 옛 공산권 나라들 가운데 몽골은 비교적 체제 전환이 순조롭게 이뤄진 나라에 속한다. 체제 전환과정에서 한동안 마이너스 성장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등 민주주의가 착실히 전진하고 있다. 올해 건국 800주년을 ‘징기스칸의 귀환’이라고 명명하며 옛 체제에서는 금기시했던 징기스칸을 완전복권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건국 8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로 북적거리는 울란바토르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가족이 운영하는 기업에서 일하며 파트타임으로 통역일도 하고 있는 반드리아(34)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뒤 미국 시카고 인근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지만, 회사에서 받는 급여는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 물가는 턱없이 비싸, 점심 한끼의 가격이 최소 2천∼3천원, 웬만한 캐시미어 스웨터는 6만∼10만원이나 된다. “어떻게 이런 물가 속에서 살아가는지 나 자신도 궁금할 정도예요. 미국서 살 때는 20달러를 가지면 뭔가 살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게 안 돼요. 그런데도 거리에는 정체현상을 빚을 정도로 차들이 많고, 그 중에서도 도요타 벤츠 등 좋은 차들이 즐비하니 이해하기 어려워요.”
이런 반드리아의 한탄에 대해, 베그즈 출룬도르즈 인문대학 총장은 “지하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도장을 찍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부패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몽골에서 사업을 하는 한 한국인은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주가 다시 월급 8만원짜리 농업부 관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며, “자기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만연한 부패로 빈부차 확대
몽골 국립대학 국제관계학과의 바투르 교수는 지난 16년간 몽골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비싼 댓가를 치뤘다고 말한다. “국민의 36%가 빈곤선 이하로 떨어졌고, 체제전환기를 틈탄 부패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졌다. 또 정부가 무차별하게 광산채굴권 등을 외국기업에 넘겨 전국토의 45%가 다국적 기업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 결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재해도 심각하다. 건조한 기후가 점점 심해져 유목민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목초가 타들어가면서 가축을 잃게 된 유목민들은 도시로 몰려와 실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공식통계로는 몽골 전체 인구(약284만명)의 3분의 1 수준인 90만명 정도로 알려진 울란바토르의 인구가, 실제로는 120만 정도 될 것으로 본다. 당연히 실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2003년 공식통계로는 실업률이 6.7%라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게 출룬도르즈 총장의 이야기다.
그래서 최소 10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가, 지식계층의 공동화 현상도 심각하다고 바투르 교수는 지적한다. 바트문크 <데일리뉴스> 편집국장은 이런 상태로 계속 가다간 소수는 엄청난 부를 차지하고 대다수 민중은 배를 곯는 남미국가처럼 될 수 있다며 정부가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의지를 의심한다. 7월부터 반부패법이 발효됐지만, 관리들의 부패 추문이 끊이지 않아 집권 인민혁명당의 지지율은 2000년 59.2%에서 올해는 26%까지 떨어졌다.
작년 6.2% 성장 회생 조짐
그럼에도 몽골 경제는 회생의 조짐을 보인다. 1992년 325%까지 치솟았던 인플레율이 2004년에는 11%로 떨어졌다. 국내총생산액도 2002년에 처음으로 89년 수준을 회복했고, 2005년에는 6.2% 성장했다. “지금 몽골은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는 출른도르즈 총장의 말처럼, 몽골이 건국 800주년을 계기로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는 국가가 될 것인지는 몽골인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울란바토르/권태선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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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 거주 ‘할힌골’ 동몽골의 지명?
동몽골 지역은 부여, 선비 등 유목기마국가가 기반했던 곳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곳이 한동안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몽골 국립대학에서 한국관계를 가르치는 바투르 국제관계학과 교수도 “이 지역은 삼국유사에서도 거론될 정도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삼국유사에 백제인들은 ‘할힌골’에 살았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할힌골이 동몽골 안에 있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할힌골은 1939년 일본이 러시아-몽골 연합군에게 패퇴해,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야생마늘과 쑥이 자생하며, 고려성이라는 유적도 남아 있다.
국내의 백제 전공사학자 및 다른 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설명에 부정적이다. 국내 학계에도 백제가 만주에서 기원했다는 소수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일부 있지만, 동몽골 거주설은 더 ‘급진적’ 주장이라는 것이다. 울란바토르/권태선 순회특파원, 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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