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렬 민족주의가 협상길 막아...인구 15% 소수민족 독립요구
30년 유혈분쟁에도 끝 안보여...순환되는 폭력에 주변국 외면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분리주의자들 사이에 분쟁이 다시 불붙으면서 공포에 질린 수만 명의 시민들이 지난 몇 달 동안 거리로 몰려 나왔다. 30년 동안 지속된 양쪽의 투쟁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강대국들도 별로 관심이 없다. 지긋지긋한 투쟁은 21세기 초의 주요 이데올로기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심각해져 갈 뿐이다. 타밀 분리운동은 스리랑카의 소수 민족들이 정치·언어의 독립권을 요구하며 벌이는 운동이다. 아울러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라는 강력한 조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정치·군사 활동의 장이기도 하다. 분리주의자들은 스리랑카의 민주주의 제도가 소수 언어와 종교를 전혀 존중하지 않기에, 분리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트리코말레 항구를 포함하는 동북지방, 다른 민족들에 비해 무슬림들이 많은 남동부지방으로 이뤄진 영토를 요구하고 있다. 싱할라어를 사용하는 싱할라족(74%)이 다수를 차지하는 정부와 소수 타밀족(약 15%) 사이의 갈등은 1956년, 정확히 말해 스리랑카 자유당(SLFP)이 집권하면서 시작됐다. 자유당은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선포하고 싱할라족의 지배 종교인 불교를 우대해, 싱할라족과 타밀족의 접경지역에서 여러 건의 충돌이 발생했다. 타밀족은 대다수가 힌두교도들이며 소수가 가톨릭 신자들이다. 양쪽의 충돌은 잠잠하다 70년대에 다시 발생했고, 83년 7월 유혈사태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약 30년 동안의 충돌로 타밀족이 거주하는 북쪽과 동쪽 지역들은 경제적으로 낙후됐다. 타밀족에게 유일한 희망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무력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1994년 찬트리카 쿠마라퉁가가 대통령이 된 뒤 협상을 재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타밀 호랑이 부대는 정부군이 북부 지역을 재탈환하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싱할라족이 거주하는 도시 곳곳에 테러공격을 감행했다. 2002년 초에 휴전협정이 타결된 이후에 타밀 호랑이와 동거정부가 협상을 재개했지만, 다음 해 결렬됐다. 2005~06년 협상과 투쟁이 교차한 뒤, 2007년 2월4일 마힌다 라자파크세 대통령은 대화 재개를 타밀 호랑이에게 제안했다. 여러 변화 속에서 스리랑카의 정치·경제·사회 상황은 악화됐다. 전투가 재개되면서 고립지역의 물자수송로가 폐쇄됐다. 또 정부군이 민간건물을 목표로 폭탄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정부는 반군의 건물로 추정되는 곳을 공격했고, 베일에 싸인 암살이 늘어나기도 했다. 협상 시도가 연달아 실패한 것은 어느 정치학자가 이름붙인 ‘충돌의 그레셤 법칙’ 때문이다. 극렬주의자들이 온건파들을 몰아내려고 하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셤의 법칙이 아니고 무엇인가. 분리주의자들은 2002년에야 완전 독립 요구를 철회했다. 대신 자주적인 결정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중재 노력이 실패한 이유는 구조적인 데서 찾을 수 있다. 중재에 나섰던 인도나 노르웨이는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타밀 호랑이와 스리랑카 인민해방전선은 식민지배에 이은 국제개발기구의 개입, 외국 인도주의 단체의 진출과 같은 역사로 인해 더욱 극렬한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스리랑카 문제에 개입하는 세력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싱할라족은 타밀족과의 갈등을 국내에서 해결하고 싶어 하지만, 타밀족은 분쟁을 국제화시키고자 애썼다. 서구 국가에 흩어져 사는 타밀족이 스리랑카의 타밀족에게 영향력을 미치면서 타밀 호랑이가 여러 국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갈수록 호전적인 해외 거주 타밀족의 태도, 지진해일 피해 당시 원조금 유용 가능성은 호의적이었던 국가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비록 오랫동안 인내심을 가져온 관련 국가들의 태도가 당장에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에릭 폴 메이에르/프랑스 국립동양학학교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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