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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육군 라이트 아모르 여단의 ‘부들 파이트(먹을거리 전투)’. 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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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군 전통 ‘부들 파이트’…뒤엉켜 오른손으로
마당 식탁 위 밥 국수 구이 젓갈 등 한데 섞어 수북
필리핀 군대가 자랑하는 전통 ‘짬밥’이 있다. 이른바 ‘부들 파이트’(boodle fight). ‘부들’이 따갈로그(표준 필리핀어)로 ‘먹을거리’니까, 우리말로 옮기면 ‘먹을거리 전투’쯤 된다. 이달 초 취재차 필리핀 민다나오섬 카가얀 데 오로에 있는 필리핀 육군 라이트 아모르 여단에 들렀을 때 우연히 이 ‘전투’를 경험했다.
경비행기 들어와 ‘고사’ 뒤 뒷풀이로
5월3일 이 여단에 정찰용 경비행기가 한 대 추가로 들어왔다. 라이트 아모르 여단은 기존에 1대의 경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새로이 한 대를 추가한 것이다. 이 비행기는 공장에서 바로 제작되어 배치된 전투용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쓰이던 비행기가 페인트칠만 새로 한 ‘중고품’이었다. 수천개의 섬들로 이뤄진 나라이니만큼, 경비행기는 군 지휘부의 비상이동 수단으로 요긴하다.
한국에서 새 건물을 짓거나 차량을 구입해 본격 사용에 앞서 맨 먼저 하는 일은 천지신명에게 ‘가호’를 부탁하는 ‘고사’다.
아시아 유일의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식이 있다. 필리핀 군대는 가톨릭 군대답게 미사를 드리고, 성수를 기체에 뿌리며 군인들이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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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라이트 아모르 여단의 ‘중고품’ 경비행기. 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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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도 수저도 없이 먹자 신호 따라 눈 깜짝할 새 뒤이어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다. 마당 한켠의 식탁 위에는 넓적한 바나나 잎에 음식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쌀밥과 국수, 양배추·당근 볶음, 생선구이, 닭고기 조림, 돼지고기 구이, 생선젖갈 등이 한 데 섞여 있었다. 그릇도 없고 수저도 없다. 여단장인 사가니 씨 칵후엘라 장군(소장)이 “먹자”는 얘기를 툭 던지자, ‘부들 파이트’가 시작됐다. 식탁 주위에 둘러 선 군인 30여명이 서로를 밀어내면서 빠른 속도로 먹었다. 먹을 것 앞에서 체면이나 계급은 없었다. 2성장군도, 일등병도 손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다가 집어넣기 바빴다. 그야말로 ‘계급장 떼고’ 전투적으로 먹어치웠다. 눈깜짝 할 사이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음식이 바닥났다. 참석자 수에 견줘 음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만, 장군이 참석하는 특별행사라서 그런지 음식맛은 꽤 훌륭했다. ‘전통’에서 약간 벗어나 음료가 준비됐다. 실전 대비 훈련이 전통으로…최근엔 특식 칵후엘라 장군은 “실전이 벌어졌을 때 그릇이나 수저 등 도구가 없이도 빠른 시간 안에 식사를 해결하려고 이런 방식으로 밥을 먹는 훈련을 하던 것이 전통으로 굳었다”며 “최근에는 군대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특식으로 먹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들 파이트’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만 써서 먹어야 한다. 둘째, 식사를 가장 짧은 시간에 끝낸다. 셋째, 계급을 의식하지 않고 양보없이 양껏 먹는다. 음식량은 약간 모자라게…전우애는 덤 비록 실전은 아니지만, ‘특식’으로 먹을 때조차 음식량을 부족하게 마련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음식이 많으면 여유있게 식사를 하게 될테니 먹을거리를 모자라게 준비해서 서둘러 식사하는 훈련을 시킨다. 빅 제임스 대령은 “장군도 병사들과 함께 경쟁적으로 밥을 먹으며 서로 몸을 부딪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근한 느낌이 들고, 덤으로 든든한 전우애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말 그대로 ‘눈깜짝할 새’ 식사를 마친 군인들은 바가지로 양동이에 담긴 물을 떠서 서로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민다나오/<한겨레〉온라인뉴스팀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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