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8.12 20:43
수정 : 2007.08.1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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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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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 갈수록 주변부 내몰려
한족 득세 몽골말도 뒷방신세
‘자치구 60년’ 중국은 자화자찬
8일 중국에선 두 개의 큰 잔치가 벌어졌다. 하나는 꼭 1년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대규모 축제였다.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이 경축행사엔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가 대거 참석해 올림픽 카운트다운이 시작했음을 선언했다.
다른 하나는 내몽골자치구 수도 후허하오터에서 열린 자치구 성립 60주년 기념행사였다. 이날 후허하오터의 밤하늘엔 수천발의 폭죽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내몽골은 중국 최초의 성급 소수민족 자치구이다. 내몽골·광시장족·시짱·닝샤회족·신장위구르로 구성된 5개 대형 자치구의 맏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자치구는 중국이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이른바 ‘중화민족’ 국가라는 점을 과시하는 증거로 쓰인다. 중국 공산당과 전국인민대표대회, 국무원, 전국정치협상회의는 이날 내몽골자치구에 띄운 축전에서 “한족과 소수민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날 내몽골자치구에선 ‘공산당 용비어천가’가 울려퍼졌다. 대규모 중앙대표단을 이끌고 기념식에 참석한 쩡칭훙 부주석은 “내몽골자치구는 공산당의 영도로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있다”며 “번영과 단합, 안정을 바란다면 공산당을 받들어야 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관영 〈신화통신〉도 “내몽골자치구 주민들의 평균수명이 60년 사이에 35살에서 70.7살로 늘어나고, 유아사망률은 43%에서 2%로 떨어졌다”고 자랑했다. 이날 기념식에 이어 열린 화려한 연회의 제목은 ‘초원의 찬가’였다.
그러나 내몽골자치구와 붙어 있는 몽골에선 축가가 울리지 않았다. 내몽골자치구의 성립은 몽골의 분단이 사실상 영구화됐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날을 기해 몽골은 고비사막을 경계로 북쪽의 독립국과 남쪽의 자치구로 갈라졌다. 해방 이후 한민족이 남북으로 쪼개진 것처럼 몽골족도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발생한 민족적 격변이었다.
몽골은 17세기부터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1911년 신해혁명을 계기로 중화민국이 서는 과정에서 홀로서기를 시도하지만,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반쪽 독립’에 그치고 만다. 1924년 외몽골에 들어선 몽골인민공화국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중국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몽골은 항일투쟁에 동참한 공로로 1947년 자치구로 인정받는다. 한때 동서양을 아울렀던 제국이 자기 민족마저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셈이다.
내몽골자치구는 소수민족에 대한 한족의 왕성한 식욕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몽골족은 하루가 다르게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인구의 대부분이 이미 한족으로 채워졌고, 몽골족의 언어도 초원의 목장과 전통공연에서나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내몽골자치구에서 베이징이 쓰는 전력의 3분의 1을 생산해내는 탓에 ‘베이징의 발전소’라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칭기스칸마저 중국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내몽골자치구의 성대한 환갑잔치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이날 후허하오터 박물원에선 어른 키의 두 배는 됨직한 거대한 ‘솥’(鼎)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 주석이 친히 ‘민족대단결보정’(民族大團結寶鼎)이라고 이름까지 써서 내려보낸 이 솥의 겉엔 내몽골의 광활한 초원과 높은 산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졌다. 솥의 두 귀와 세 발은 말안장과 말발굽 모양을 형상화했다.
세 발 달린 솥은 중국 역사에서 황권을 상징한다. 황실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이 솥을 이용해 음식을 했기 때문이다. 후 주석은 내몽골자치구의 성립을 축하하는 선물로 강력한 전제정치의 상징물을 내려보낸 셈이다. 민족대단결보정에 ‘몽골’은 없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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