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30 19:59
수정 : 2007.09.30 23:30
시민들 총구 피해 ‘게릴라 시위’
지금 미얀마(버마)는 세계로부터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다.
미얀마 군사정권은 20년 만에 군부통치에 저항해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무차별 발포로 맞대응하고 있다. 군사정권은 그나마 시위 소식을 외부 세계로 전해주던 인터넷마저 전면 차단했다. 국제사회의 눈길에 아랑곳하지 않는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미얀마 국민은 더 큰 고립감과 공포에 짓눌려 있다.
30일 현지 상황을 담은 기사를 송고하려고 호텔의 비즈니스룸에서 씨름하다가 양곤(랑군) 주재 코트라 지사를 찾았다. 이메일이 작동하는 것 같아 사진과 함께 송고했다. 하지만 서울 본사에서는 이를 받지 못했다. 팩스 전송도 차단됐다. 외국 기관의 이메일과 팩스마저 미얀마 군정이 검열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양곤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도 인터넷에 접근할 수 없었다. 결국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통신수단인 국제전화를 붙들고 기사를 불러야 했다.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외국 공관의 인터넷마저 끊은 것에서 미얀마 군정의 정보통제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의 집으로 통하는 도로에는 삼중 사중의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도로 한복판에는 진지를 쌓고 기관총이 걸려 있었다.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반정부 시위는 주춤하고 있다. 군정의 무력 탄압 탓이다. 30일 양곤에서 집회와 시위의 주무대가 된 술레탑과 슈웨다곤탑 사이의 술레탑 대로나, 몇백 미터 떨어진 슈웨본타 대로는 군인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일요일인 이날도 병력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대로를 질주했다. 승려들을 필두로 시위대가 가득 찼던 이 길 곳곳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었다. 시위가 예상되는 오후에는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상가는 문을 닫는다.
29일 오후, 슈웨본타 거리는 순식간에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이른바 게릴라식 시위였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네거리 쪽으로 몰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하나로 합쳐졌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평화, 평화!” 박수와 고함이 터져나왔다. 승용차 차체를 두들기며 환호하는 이도 있었고, 손짓으로 주변의 동참을 촉구하는 이도 있었다. 20~30대가 주축인 시위대는 금방 1천여명으로 불어났다. 한쪽에서는 붉은 띠를 두른 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사진을 앞세운 채 국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상인들은 휘파람을 불고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나온 대학생 미무치는 “우리는 현 정권에 반대하고 (야당인) 민족민주동맹을 지지”하기 때문에 거리로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온 나라가 분노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오후 1시40분께 시작한 시위는 20분이 못 돼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술레탑 대로 쪽에서 방패를 앞세운 경찰이 거리를 좁혀왔다. 무장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은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며칠 전 유혈 참사의 기억이 생생한 시위대는 인도로 올라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는 그들을 향해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경기관총을 겨눈 지프가 접근했다. 시위대는 불과 수십 미터 거리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다. 곤봉을 치켜든 경찰이 달려들 듯이 위협했고, 뒤에서 자동소총을 멘 군인들이 노려봤다. 투쟁을 독려하는 외침이 터져나왔지만, 맨주먹의 시민들은 총구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날 시 외곽에서 수백명이 모여 벌인 시위도 오래가지 못했다. 27일 7만여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 이후 짧은 휴지기가 시작된 것인지, 시위가 완전히 수그러든 것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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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최대도시 양곤 시내를 장악한 군경들이 29일 시민 3명을 체포하고 있다. 양곤/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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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시위가 위축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군사 정부의 ‘노련한’ 압박책이 먹혀든 때문으로 풀이된다. 시위대에 대한 발포와 더불어, 이번 시위를 주도한 승려들에 대한 ‘봉쇄’가 민주 진영의 예봉을 꺾는 데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28일부터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한 시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승려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29일 양곤 중심가의 기습시위에서 승려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26일 밤부터 양곤 시내 사원들을 뒤져 시위에 적극적인 승려들을 중심으로 700여명을 연행해 갔다.
군사정권은 에너지 가격 폭등이 도화선이 된 이번 사태의 초기인 지난달 중순에 이미 1988년 대학생 지도부 출신인 ‘88세대’ 13명을 구금하며 기민하게 대응했다. 이달 들어 사태가 확산되자, 야당인 민족민주동맹 간부 40여명을 비롯해 요시찰 인물 400여명을 체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속을 피한 야권 인사들은 ‘지하’로 숨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승려들의 조직력은 결정적 동력이 되어 왔다. 이번 시위 과정을 지켜봐 온 한 시민은 “처음에는 스님들이 자기들끼리만 하겠다며 시민들한테 시위에 나서지 말라고 했다”며 “‘스님들이 저러는 것을 보니 눈물이 난다’는 사람들이 합류해서 시위가 커졌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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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양곤시 술레탑 인근 슈웨본타 거리에서 29일 오후 시민들이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장군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사진은 현지의 인터넷과 팩스 등 데이터 통신이 불통돼, 미얀마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제3국의 위성을 이용한 위성전화로 전송됐다. 양곤/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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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의 한 소식통은 “확산되던 시위가 한풀 꺾이고 산발적인 형태로 된 데에는 요주의 인물들을 꽁꽁 묶는 방식이 효과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군부 집권 장기화로 감시와 통제 기법이 발전한 것도 이런 대응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군사정권은 외부와의 주요 연결수단인 인터넷을 차단하며 세계의 관심으로부터 나라를 고립시키고 있다. 군사정권은 과거 국제전화를 끊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도 했다.
해가 긴 양곤 거리는 저녁 7시가 돼도 대낮이지만 인적은 찾기 힘들다. 9시 통행금지 때문에 버스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주요 공략대상인 거대한 불탑 등 요소요소에 배치된 군인과 정·사복 경찰들의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러면 양곤은 다시 ‘유령도시’로 변할 준비를 마친다.
양곤/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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