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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틸 린트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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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전문가 린트네르 인터뷰
미얀마의 민주화를 갈구하던 이들은 양곤의 시위가 진압되며 가슴 아파했다. 20여년만에 성사된 시위가 40년 넘게 지속된 군부독재를 타도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미얀마 관련 최고 권위자중 하나인 베르틸 린트네르 전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 기자는 8일<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군부가 미얀마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승려들을 탄압함으로써 자신들의 무덤을 팠다는 것이다. 그는 또 “오늘도 수많은 언론인들이 검열을 피해 기사 행간에 진실을 전달하고, 군인들도 소극적이나마 명령에 불복종하며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며 “결국 희망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망명 세력이 아니라 미얀마 내부에서 투쟁하는 이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미얀마에 대한 글을 써온 린트네르는 아웅산 수치와 미얀마 군부 등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으로, 미얀마에 대한 책 10여권을 집필한 바 있다. 승려 탄압, 군정 자충수 될것…민주화조직 재건이 관건“망명뒤 편안한 저항” 쓴소리…‘반골 군인’ 수천명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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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양곤의 거리에서 한 인력거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양곤/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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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현 시위는 실패했다. 기대가 컸는데, 왜 이렇게 됐나. =처음부터 안될 것이라고 봤다. 리더십 부재 때문이다.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1988년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이 투옥 혹은 가택연금 당했고, 나머지는 외국으로 망명했다. 1988년에는 정치 지도자도 많았고, 젊은 학생들도 튼튼한 조직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시위 시작 2주 뒤에 아웅산 수치가 등장했고, 총리를 역임한 우 누(U Nu)와 군 출신인 틴 우(Thwin U)같은 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반면 이번 시위는 승려들이 주도했다. 승려들은 20세기 초반 미얀마의 독립운동을 운동을 주도했다. 감옥에서 단식투쟁하며 죽은 승려도 있다. 그러나 승려들은 사람을 조직할 수 있지만, 정치 지도자가 될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1988년에는 승려들이 한 역할이 거의 없지 않는가. =맞다. 그런데 미얀마인들에게 불교가 주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번 시위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군부정권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미얀마 역사에서 불교가 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째는 식민지 시기 영국군이 사원에 신발을 벗지 않은 사건에서 유발됐다. 소위 ‘신발 사태’라고 하는 이 사건은 미얀마인들의 분노를 불러와, 독립투쟁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올해 시위에서도 역시 군부는 군화를 신고 사원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했다. 외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게 미얀마 사람들이 가장 민감해하고 분노하는 지점이다. 영국군은 승려들을 죽이지도 않았는데도 쫒겨났지만, 이번에는 승려들이 피를 흘렸다. 고로 이번 시위는 끝난게 아니라 탄 슈웨 정권의 종말을 고하는 ‘끝의 시작’에 불과하다. 역사가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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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검문 /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과 북쪽의 바고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에서 경찰이 바리케이드와 임시검문소를 설치하고 지나는 차량들을 감시하고 있다. 바고 양곤/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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