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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0.15 19:59 수정 : 2012.10.15 22:20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왕위 올라
일본·프랑스 등에 맞서 독립 투쟁
미국 주도한 쿠데타로 축출되기도
크메르루주 집권뒤 연금·자살시도
북 김일성·중 마오쩌둥과 친분도

시아누크 캄보디아 전 국왕 사망

동남아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던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이 15일 89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보좌관인 시소와트 토미코 왕자는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치료중이던 그가 이날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1941년 왕위에 오른 시아누크는 두 차례 왕위, 대통령, 총리, 국가수반, 망명지도자, 상왕 등을 거치며 동남아 현대사를 온몸으로 돌파한 현실 정치인이었다. 식민과 독립, 혁명과 반혁명, 전쟁과 협상, 학살과 화해 등 정치 격변기에 때론 주역으로 때론 패배자로 종국적으로는 중재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1922년 캄보디아 왕족인 노로돔 가문의 큰아들로 태어난 그는 애초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그가 18살이 되던 해에 그를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렸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국왕이 사망한 뒤 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할 차례였지만 프랑스 당국은 이를 무시했다.

그는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전격적으로 캄보디아 독립을 선포했고, 또 일본이 패배하자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했다.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전에서 패배가 확실해지자 그는 프랑스를 설득해 1953년 11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얻어낸다.

독립 뒤 왕위에서 물러난 그는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해 첫 총선에서 압승하고 일당통치 정부에서 대통령, 총리, 외교장관을 겸임했다. 그는 당시 냉전 상황에서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60년대 이후 베트남전이 가열되면서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를 병참수송로로 활용했고, 미국은 론 놀 장군을 사주해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중국으로 망명한 시아누크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세력인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어 1975년 론 놀 정권 타도에 큰 힘이 된다. 크메르루주 집권 뒤 캄보디아의 명목상 대통령이던 그는 1년 만에 사임하고 사실상 연금상태에 놓였다. 자신의 아들 5명과 손자 15명을 포함해 170만명이 집단학살당한 크메르루주의 만행에 그는 자살도 시도했다.

1979년 베트남에 의해 크메르루주 정권이 타도됐으나, 그는 크메르루주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캄보디아의 베트남 속국화를 우려한 그는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의 외교에 힘입어 캄보디아는 1991년 결국 유엔 중재로 베트남과 종전협상을 타결짓는 데 성공했다.

이후 총선에서 아들 라나리드 왕자의 정당이 압승했으나, 내전을 우려한 시아누크는 아들에게 공동총리제를 제안해 훈 센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은 다시 왕위에 올라 캄보디아 정파들의 중재자로 활약했다. 2004년에는 발레리노 출신의 아들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다.

프랑스 와인과 음식 애호가였던 그는 마오쩌둥, 김일성 주석 등과의 교류도 깊었다. 6번 결혼하고 최소 14명의 자식을 둔 그는 색소폰 연주가, 작곡가, 영화제작자이자 감독으로 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 “비극의 주인공은 시아누크가 아니라 캄보디아 인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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