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14 15:51
수정 : 2006.01.0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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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뉴기니 라바울의 심슨 항구를 둘러싼 활화산 분화구에서 쉼 없이 뿌연 연기가 나오는 모습이 멀리 보이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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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8일 새벽 피스보트는 이번 항해의 마지막 기항지인 파푸아 뉴기니 라바울에 도착했다. 뉴브리튼 섬 동부 끝자락에 자리한 라바울의 심슨항은 제2차 대전 당시 남태평양 방면으로 진출한 일본 해군의 사령부가 있던 장소다. 태평양전쟁의 이른바 ‘남부 전선’이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전쟁이 끝난 지 꼭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라바울 일대에는 일제의 군대가 만들어 놓은 침략의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날 오전 9시께 퇴락한 항구를 빠져 나와 거리로 나섰다. 심슨 항구를 둘러싼 화산에서는 연신 허연 김이 풀어져 나오고 있었다. 1994년 화산 폭발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버린 라바울의 거리에는 여전히 화산재가 두텁게 덮여 있었다. 화산 폭발 이후 10년여 세월 동안 분화구에서 쉼 없이 뿌연 연기를 뿜어 내면서, 바람에 실려온 화산재는 거리를 온통 검은 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일부 상점을 빼고는 이미 도시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라바울 시내를 지나 새 공항 건설 뒤 붐을 이루고 있다는 코코포로 향했다.
15인승 낡은 승합차량에 19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기사는 ‘차장’ 2명을 거느리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잘 닦인 도로를 내달린 것도 잠시 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리는 비포장길로 접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숨이 막힐 듯 달궈진 기온과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만들어 내는 먼지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차창을 닫았다. 이내 굵은 땀방울이 등 줄기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곁에 앉은 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코코포 시내에 자리한 전쟁박물관 앞마당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류가 즐비했다. 마당 한 가운데 버티고 선 1935년 산 3인승 경 탱크는 7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겉모양이 멀쩡한 채로 남아 있었다. 37mm 포와 7.7mm 기관총을 탑재한 탱크의 녹슨 무한궤도엔 이끼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길이 8.99m, 둘레 610mm나 되는 일본군 어뢰는 탄두 무게만 498kg에 이른다. 크고 작은 총기류에서 장갑차와 소형 전투기 잔해에 이르기까지 전시된 물품들은 모두 라바울과 코코포 인근에서 하나씩 수거해 온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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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뉴기니 라바울 인근 코코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전쟁박물관 앞마당에 1935년 산 3인승 경 탱크를 비롯한 일본군 전쟁물품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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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빠져 나와 언덕길을 따라 개젤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양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길 양편을 가득 메운 열대의 숲이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냈다. 일본군 해군방공부대 지휘소가 자리한 말마루안 언덕은 키가 어른 허리 높이까지 치솟은 들풀이 무성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채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는 거대한 방공포는 가난한 아이들의 요긴한 놀잇감이 돼 있었다. 옛 방공부대 지휘소가 들어서 있던 자리엔 ‘엠티비’ 채널을 위한 위성 송신소가 들어서 있는 게 낯설다.
산길을 돌아 내려오는 길은 ‘버마 도로’로 불리고 있었다. 남태평양까지 징용을 끌려온 식민지 버마 노동자들이 이 언덕에서 일본군 군사도로를 건설하면서 피와 땀을 흘렸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연합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군이 바지선을 숨져 놓았던 터널이 모습을 드러낸다. 1942년 초부터 1945년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일본군은 이곳 일대 산악지대에 총연장 500여km에 이르는 터널을 팠다. 식민지에서 징용을 끌려온 이들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등 연합군 쪽 전쟁포로, 현지 주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남태평양 진출의 전초기지로 라바울을 선택한 일제는 1941년 12월과 1942년 1월 잇따라 공격을 감행해 왔다. 같은 해 1월22일 항공모함 2척에서 발진한 전폭기의 엄호 아래 일본군 본대가 라바울 점령에 나섰다. 1905년 영국으로부터 뉴기니를 넘겨 받은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저항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라바울에는 일본 해군 남태평양 사령부가 들었다. 같은 해 2월 일본군은 붙잡은 전쟁포로들을 몬티비테오호에 태워 일본으로 이송하려 했지만, 미군 잠수함이 이를 격침시키면서 탑승자 전원이 숨지는 참사가 나기도 했다.
전쟁이 격화하기 시작하면서 한때 이 일대에 배치된 일본군은 9만7천여명을 헤아리기도 했다. 매일이다시피 이어진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된 대공포만 367문에 이른다. 라바울과 코코포 인근에만 라쿠나이, 부나카나우, 토베라, 라포포, 케레바트 등 여전히 남아 있는 활주로가 당시 일본군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조지 케네이 장군이 이끈 미 제5공군을 중심으로 미군은 ‘B-25’ 폭격기를 동원해 라바울 안팎에 약 2만t 폭탄을 퍼부었다. 특히 화산 폭발을 유발하기 위해 분화구를 폭격의 주요 목표물로 삼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이 막을 내리고 라바울로 진주해 들어온 연합군은 이곳에 일본군 전범 재판소를 설치했다. 390명의 일본군이 기소됐고, 188차례 재판 끝에 266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84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3명은 총살됐다. 전쟁이 끝난 뒤 라바울 일대에 있던 일본군과 군속 및 그 가족을 모두 일본으로 이송하는 데는 꼬박 2년이 걸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일본 정부는 처형된 전범이 묻힌 장소를 공개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 당했다. 그러다 1994년 화산 폭발로 라바울 일대가 화산재 밑에 묻히면서 일본군 전범의 매장지도 영원히 비밀 속에 묻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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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라바울 중심가 뉴기니클럽 마주편에 있는 이른바, 야마모토벙커엔 당시 일본군이 작전을 했던 지도가 보존되어 있다.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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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라바울 시내 중심가 뉴기니 클럽 맞은 편에 자리한 방공포 사령부는 이른바 ‘야마모토 벙커’로 불린다. 진주만 기습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미군의 표적이 됐던 일본 해군 야마모토 제독이 한 때 이곳에서 작전을 지휘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란다. 화산재가 켜켜이 쌓인 두꺼운 콘크리트 벙커 안으로 내려서니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일본 각지에서 이곳을 찾은 이들이 최근까지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리는 듯 벽에 낙서가 즐비하다. 야마모토가 사무실로 사용했다는 비좁은 원형 공간에 들어서니 천장에 남태평양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날 오후 옛 라바울 중심가에서 산 길을 따라 나마눌라 언덕 위에 오르니 심슨 항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지난 1955년 일본인 전몰자 유골을 수습해 간 일본 정부는 이곳에 전쟁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2차 대전 중 남태평양의 섬과 바다에서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며,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다. 기념비 천정에는 2차 대전 전쟁 당시 일제가 점령했던 태평양 일대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물에겐 어울리지 않게 기념비 양 옆에 벙커 모양의 조형물도 눈에 띈다. 이런 특이성 때문에 1980년 9월 기념비가 완공된 직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침략을 기념하는 것이냐”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저기가 볼링장이었다. 맞은 편은 쇼핑센터였고, 그 앞으로는 리조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볼링장 뒤쪽부터 분화구 쪽으로 쭉 뻗은 곳은 모두 주거지였다.”
자동차 정비공 조엘 파아크(42)가 10여 년 전 사라져 버린 고향 마을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는다. 1994년 9월 3개의 분화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뻘건 용암을 분출해 내면서 연출해 낸 아비규환으로 집과 일터를 모두 잃은 그는 이제 코코포의 정착촌에서 새 삶을 꾸리고 있다. 이웃에 살던 친구들이 모듬으로 정착촌을 구성하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저만치 칠이 벗겨진 채 초라하게 살아 남은 하마마사 호텔이 옛 도시의 명색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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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울 시내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파퓨아 뉴기니 사람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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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뉴기니에는 5만여년 전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문화의 역사만도 6천여년을 헤아린다. 19세기 말 영국과 독일이 반씩 나눠 점령했다가, 1차 대전 뒤 국제연맹의 결정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신탁통치를 받기도 했다. 1945년 일제 강점이 끝난 뒤에도 1975년 독립할 때까지 파푸아 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했다. 남태평양 섬나라 가운데 면적과 인구 면에서 가장 큰 나라인 파푸아 뉴기니는 각종 천연자원이 풍부한 산유국이지만, 한 해 경제 성장률은 1% 안팎에 그치고 있다.
60여년 전 만들어진 제국주의의 흉물에 둘러 쌓여 살다 보니, 파푸아 뉴기니에선 잊을 만하면 한번씩 괴이한 ‘황금열풍’이 불곤 한다. 2년여 전에도 뉴잉글랜드 동쪽 뉴아일랜드에서 미화 3억7500만 달러 상당의 황금 10t이 추락한 일본군 수송기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파푸아 뉴기니 정부는 즉각 군부대를 파견해 진위 여부를 조사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최근에도 황금을 가득 싣고 라바울 연안을 빠져 나가던 일본군 잠수함이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됐다는 얘기가 떠돌면서 잠수부들이 몰려들기도 했단다. 화산재에 파묻힌 채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허한 풍문이 꼬리를 무는 듯해 쓸쓸했다.
라바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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