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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4 19:04 수정 : 2005.03.14 19:04

10기 3차 전인대 이후 중국

14일 폐막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10기 3차회의에서 논의된 가장 중요한 사안은 ‘반국가분열법’ 통과와 더불어 장쩌민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사임안 처리와 후진타오 주석을 그 후임자로 선출하는 일이었다. 전인대는 이날 반국가분열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2896, 반대 0, 기권 2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후의 군사위 주석 승계로 신중국 역사상 가장 매끄러운 세대교체가 완성됐다. 후진타오-원자바오를 정점으로 한 4세대 지도부는 지난 20여년간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자신감이 넘친다. 이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중국을 이끌어갈 것인가. 3차례에 걸쳐 정치·경제·사회 세 분야로 나눠 살펴 본다.

명실상부한 4세대 후진타오 체제 막올라
공산당 독재 유지속 분배·복지 일부 수용
빈부차 심화, 정치개혁 등 봇물 터질수도

“3세대와 4세대의 세대교체는 일종의 ‘정권교체’라고 봐야 한다.” 베이징 외교가의 관측통들은 그렇게 말한다. 좀체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장이 퇴진한 건, 1989년 이후 지금까지 중국 지도부의 요직을 독차지하며 중국을 쥐락펴락해온 상하이방이 권력투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지적한다.

조용한 정권교체=후진타오 주석-원자바오 총리 연합세력은 집권 초기부터 상하이방과 차별적인 행보를 보였다. 상하이방이 개혁개방의 최고 수혜지역인 주강 삼각주와 상하이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데 비해, 그런 배경이 없는 후와 원은 ‘인민과 친근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차별적으로 내세웠다. 지난해 전인대 정치공작보고에서 4세대 지도부는 ‘이인위본’과 ‘과학적 발전관’을 내세웠다. 여기에 올해 전인대 정치공작보고는 ‘조화사회 건설’이란 이념을 더했다. 이런 구호는 “우선 동쪽 연해지구부터 잘 살게 한 뒤 이를 다른 곳으로 확산시키자”는 덩샤오핑의 이른바 ‘선부론’에 비해 ‘발전’보다 ‘인민’을 내세우는 논리다. 오늘날 중국 정치세력을 자유주의, 보수주의, 권위주의, 신좌파 등으로 대분할 때, 상하이방이 개발독재를 추구해온 권위주의 정치세력이라면, 후-원체제는 분배·환경·복지 등에 관한 신좌파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노선이다.

정치적 보수주의=그럼에도 후 주석-원 총리 연합세력의 기본 성향은 정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성장과 사회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의 후계자다. ‘정치의 안정’이란 공산당 일당독재 체재의 유지를 통한 정국안정을 뜻한다. 후 주석은 2002년 11월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부터 공산당을 ‘혁명정당’에서 ‘집권정당’으로 변신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2002년 12월 중앙정치국 집체학습의 부활 △2004년 3월 공산당의 ‘집정능력 강화’ △2004년 9월 6800만 당원의 ‘선진성’ 교육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후 주석은 최근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이끄는 선봉대이므로 당원이 선진적이지 않으면 대중을 지도할 수 없다”며 모든 당원이 의무적으로 학습에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후진타오가 처음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때 영국 <비비시>는 그가 “권위주의자인가? 자유주의자인가?”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후가 ‘자유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은 하지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베일을 벗은 후는 공산당 일당독재의 보수 정치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임이 드러났다. 이런 보수주의는 지난 1월17일 자오쯔양 전 총서기가 사망했을 때 삼엄한 보도 통제와 권위주의적인 사후 처리 과정에서 충분히 감지됐다.

정치개혁에 대한 전망=후 주석은 정치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개방 사이에서 발생한 모순을 ‘조화사회’라는 구호 아래 복지·분배제도의 부분적 개선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난 20여년 개혁개방이 낳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도농격차,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 사회문제가 정치개혁의 요구로 이어질 때 과연 그 도전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부호가 찍힌다. 오는 4월5일 베이징의 대학생들은 지난 1월 숨진 자오쯔양의 추도식을 베이징 중심가 천안문광장에서 할 계획이다. 이 행사는 1989년 이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제기되는 정치개혁의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또한 막 출범한 후진타오 노선의 첫 시험장이 될 전망이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장쩌민 이후 상하이방, 사화산 혹은 휴화산?



△ 14일 폐막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10기 3차회의는 장쩌민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의 사임안을 가결하고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그 후임자로 선출함으로써 후 주석 중심의 제4세대 지도체제를 완성했다. 지난해 9월 당 16기 4중전회에 모습을 나타낸 장쩌민(오른쪽)과 후진타오(앞줄 왼쪽).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가 상하이방과 권력투쟁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쩌민 조기 퇴진이라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건 상하이방의 거물 주룽지 전 총리가 일찌감치 후진타오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후의 칭화대 선배이기도 한 주룽지는 2003년 5월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작성한 금융계 내부 비리 보고를 보고 크게 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5월 하순 당 중기위는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129명의 연합조사소조를 파견해 상하이 최고의 갑부 저우정이(45) 눙카이집단 회장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어 그와 그의 부인 마오위핑을 포함해 그의 회사 간부 6명을 줄줄이 구속했다. 저우정이의 구속은 상하이방에 대한 공세의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저우정이는 상하이의 일인자 천량위(59) 시당 위원회 서기와 긴밀한 사이이며, 천량위는 상하이방의 핵심인 쩡칭훙 부주석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후 주석-원 총리 연합군과 상하이방의 충돌은 2004년 6월 당 16기 4중전회 일정이 9월 중순으로 확정되면서 ‘백병전’이라 불릴 만큼 가열됐다. 지난해 7월 <21세기 경제보도>는 정젠위안이란 가명의 인물이 홍콩 평안보험 마밍저 회장으로부터 73억홍콩달러(약 1조원)의 주식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인터넷에는 정젠위안이 원 총리의 아들 원윈쑹이라는 글이 나돌았다. 90년대 후반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원윈쑹은 유니허브라는 인터넷 솔루션회사를 차린 뒤 중국공상은행, 홍콩국제공항, 광둥전신, 중국이동통신 등 굵직한 대기업의 인터넷 관련 업무를 맡아 업계의 새별로 떠올랐다. 진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원자바오는 ‘평민총리’라는 명성에 상처를 입었다. 홍콩 언론 <명보>는 이 사건이 “상하이방의 반격”이라고 해석했다.

8월2일 국무원 감찰부는 광둥성 선전에서 홍콩중국은행 부총재인 주츠와 당위 서기 겸 부총재 딩옌성 두 사람을 공금횡령 혐의로 잡아들였다. 두 사람은 쩡 부주석의 ‘금융권 직계’들이었다. <대기원시보>는 이 사건이 “상하이방에 대한 재반격”이라고 해석했다.

이 즈음 열린 중앙군사위에서 장쩌민은 직격탄을 맞았다. 장의 군부 직계로 알려진 차오강촨(70) 국방부장, 쉬차이허우(62) 총정치부 주임, 량광례(65) 총참모장 등 세 사람이 강력하게 장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후 주석을 지지하는 원로 그룹인 장전(91)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의견을 조율한 뒤 장의 용퇴를 건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장을 끝까지 지지한 군사위원은 궈보슝(63) 중앙군사위 부주석뿐이었다.

장쩌민 퇴진 이후 상하이방은 숨을 죽이고 있다. 한 관측통은 “천량위 상하이 시위 서기, 궈보슝 부주석 두 사람의 거취가 앞으로 권력투쟁이 더 심화할지, 아니면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지에 대한 시금석”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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