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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5 17:38 수정 : 2005.03.15 17:38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14일 전인대 10기 3차회의 폐막식 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중국은 경기 과열을 방지하기 위한 거시경제 조정 정책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10기 3차 전인대 이후 중국 <중> 경제분야

14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0기 3차회의 폐막 뒤 열린 원자바오 총리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나온 중국 경제와 관련한 질문들은 △‘3농’ 문제와 △거시경제 조정에 집중됐다. 이는 지금까지의 급속한 성장 드라이브 정책으로 인한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고 기득권층의 저항을 어떻게 분쇄하느냐 하는 새 지도부의 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경기과열 대책불구 연착륙 불투명
계층갈등 심화·기득권 저항도 ‘큰산’

‘빈자의 경제학’과 그 한계=원 총리는 농촌·농민·농업 등 이른바 ‘3농’ 문제 해결방안에 대해 답하면서 1979년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시어도어 슐츠(1902~1998)의 말을 인용했다.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은 가난하다. 만약 가난한 사람의 경제학을 안다면 당신은 경제학의 중요한 원리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안 것이다. 세계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만약 농업을 안다면 당신은 가난한 사람의 경제학을 아는 것이다.”

원 총리는 ‘3농’ 문제의 해결을 두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1단계는 농민에게 자주적 영농권을 부여한 농업개혁이다. 이는 1978년 개혁개방 초기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소농경제로 전환하면서 실시한 개혁이다. 2단계는 도시가 농촌을 지지하는 단계다.

그러나 현 지도부가 ‘농촌 살리기’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낼지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이른바 ‘민공황’이라 불리는 공장 일손부족 현상이다. 지난해 정부가 농업세를 줄이고 보조금 지출을 늘리자 농촌 출신 산업예비군이 귀농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장성 도시 원저우의 경우 이번 춘절(설) 연휴 이후 20%의 농민공(도시에 유입한 농촌 호적의 임시노동자)이 공장에 복귀하지 않았다. 지난해 정부의 농촌지지 정책으로 농가 수익이 16% 증가한 결과다. 최근 중·서부 개발로 고향에서 가까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도 동부 연해지구 일손부족 현상을 부추겼다. 고부가가치 기술보다는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중국 연해지구의 산업도시들은 이 때문에 중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낮아질 것을 우려한다.

‘경착륙’에 대한 우려=원 총리는 14일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4월 말부터 시행해온 철강·시멘트·자동차 등 일부 과열업종에 대한 통제와 불량대출 회수를 뼈대로 한 이른바 ‘거시경제 조정’이 “뚜렷한 효과를 낳아 경제의 급격한 승강이나 물가 앙등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그는 그러나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배를 젓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하게 된다”는 중국 속담을 인용해 ‘거시경제 조정’의 기초가 아직 튼튼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 올해 춘절(설) 연휴 닷새째인 지난 2월13일 상하이 시내 쇼핑 몰이 몰려든 수천명의 쇼핑객들로 붐비고 있다. 상하이/AFP 연합
중국의 거시경제 조정은 경기과열을 방지해 경제의 ‘연착륙’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9.5%로 96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앤 크루거(69)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는 1월14일 “지난해 비록 중국이 은행대출 통제와 금리인상 등 경기과열 예방조처를 취했지만 아직 연착륙을 확신하기 어렵다”며 지난해 3/4분기부터 고정자산 투자가 다시 크게 늘고 있음을 불안요인으로 꼽았다. <독일의 소리> 중국어판은 4일 “지난해 9.5%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성장률을 7% 정도에서 잡겠다고 한 원 총리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말해준다”며 “비록 정부가 은행대출을 통제했지만 각 분야의 투자는 25% 이상 늘었고, 지하금융을 동원한 부동산의 과열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전망=후진타오-원자바오 지도부의 인본주의 경제개혁은 빈부·도농격차의 해소와 경기과열의 방지 등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두 문제 모두 단기 처방으로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다. 원 총리는 “경제발전을 너무 늦춰도 너무 재촉해도 안 되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경기가 과열로 치닫다 거품 붕괴로 인해 금융위기가 닥치는 사태도 피해야 하지만, 계층 갈등 해소에 치중하다 경제가 침체에 빠지는 ‘분배의 늪’도 피해가야 한다는 말이다. 인본주의, 과학적 발전관과 더불어 조화사회 건설을 국정이념으로 제시한 후-원 지도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성장 드라이브 속의 ‘특권 자본주의’가 낳은 기득권층의 저항을 어떻게 분쇄하느냐가 남은 숙제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78년 무오개혁·92년 2차개혁 두가지 단절적 개혁 이뤄져”

우궈광 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체제개혁연구실 연구원은 최근 1978년 이후 진행된 이른바 ‘개혁개방’이 “두 차례에 걸친 서로 다른 성격의 개혁이 단절적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의 글은 후진타오-원자바오 지도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난 1월17일 숨진 자오쯔양이 당 총서기를 맡고 있던 87년 덩샤오핑의 동의 아래 정치개혁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중앙정치체제개혁연구실’의 연구원이던 우궈광은 주간 <진화문론>(1월22일 발행)에 발표한‘개혁과 2차개혁에 관한 시론’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사망과 문화대혁명의 종결 이후 중국은 78년에 시작된 ‘무오개혁’(78년이 갑자로 무오해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과 92년에 시작된 ‘2차개혁’ 등 두 차례의 개혁을 겪었다. 두 개혁은 개혁의 주체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78년의 무오개혁은 농민들이 잘 살기 위한 자발적인 동기에서 추진한 개혁으로 인민공사의 해체와 자영농 체제의 확립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성은 급증했으며 농민은 개혁의 주체이자 수혜자였다. 우는 이 개혁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며, 개혁 성향의 지도부가 이를 묵인·호응·지지함으로써 ‘아래와 위가 결합된 개혁’”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개혁은 정치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89년 6·4 천안문 유혈사태로 막을 내린다.

‘2차개혁’은 천안문사태 이후 덩샤오핑이 92년 광저우 선전 등 남쪽 도시를 돌며 개혁개방을 다시 추진할 것을 주창한 이른바 ‘남순강화’에서 동력을 얻어 추진된 개혁이다. “동부 연안도시를 먼저 부유하게 하자”는 내용의 이 2차개혁은 “농민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무오개혁으로 인해 ‘먼저 부유하게 됐던’ 농민들마저 상대적 절대적 빈곤상태에 빠뜨렸다.” 2차개혁의 주체는 “관료-자본-지식엘리트의 삼각 신성동맹”이며 이는 “공산당 일당독재체제 아래 길들여진 개혁”이었다.

우는 흔히 ‘78년 이후의 개혁개방’이라고 통틀어 부르는 시기를 이렇게 둘로 나눠봄으로써 “중국의 정치현실을 더욱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관점을 빌려 후진타오-원자바오 지도부의 개혁을 평가한다면, 2004년부터 시작된 이 개혁은 “동부연안부터 부유하게 만들자”는 덩샤오핑의 이른바 ‘선부론’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이 개혁이 농민 등 민중의 자발적 개혁성향을 끌어내고 이들을 개혁의 주체로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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