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시내 중심가를 향해 행진하다 경찰의 봉쇄에 막혔고, 이튿날 사원의 전화가 불통되더니 3월12일에는 라싸 시내 모든 전화선이 차단됐다. 소남은 "당시 도시는 폭발 직전의 부싯돌이 든 통 같았다. 14일 내가 친구와 함께 라싸 북쪽 세라사원를 방문했을 당시 이미 시내 중심가 라모체 사원에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사원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시민들이 동참했다"고 말했다. 소남 역시 300∼400명에 달하는 시위대에 동참해 '우리는 자유로운 티베트를 원한다', '참파(티베트식 보리 빵)를 먹는 모든 사람들은 일어나라' 등 구호를 외치고 30∼40명 가량의 경찰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서 발포가 시작됐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년의 한 남자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어 또 다른 무리의 무장 병력이 거리로 나와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실어갔고 이들이 떠난 자리엔 유혈이 낭자했다"고 덧붙였다. 소남은 친구와 함께 조캉사원이 위치한 바르코르 거리로 향했는데, 이곳의 일부 건물 창문에서는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군중들은 2명의 사망자를 '순교자'로 칭하며 밤 9시까지 시위를 지속했다. 이날의 기록을 두고 중국 당국과 티베트 망명정부는 서로 아주 다른 주장을 펴 왔다. 중국 당국은 이날 사망자가 22명이며 사망자는 티베트 시위대의 폭동 때문에 발생했다고 했다. 반면 망명정부 측은 당초 유혈진압에 의한 사망자가 100명을 넘었다고 발표했고 이어 218명까지 늘었으며 이들의 신원을 공개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소남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티베트 폭도들이 한족이 소유한 재산을 약탈했으며, 이에 대해 중국 정부가 아주 잔인한 진압을 통해 국가의 힘을 과시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세라 사원으로 돌아간 소남은 군 당국의 통제하에 이틀을 사원에 갇혀 지냈으며, 사원에서 풀려났을 때는 라싸 시내에 경찰 초소가 넘쳐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소남은 1년 전에 신청했던 네팔 방문비자를 4월26일에 발급받은 뒤 카트만두를 거쳐 이틀 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로 들어왔다. 소남은 인도 일간 힌두스탄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내 임무는 당시 라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 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며 "내 입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유혈사태를 계기로 티베트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시위는 한층 격렬해졌으며, 더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특파원 meolakim@yna.co.kr (뉴델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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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4일 티베트 라싸에서는 무슨일이… |
중국이 티베트 분리독립 시위자들을 유혈 진압한 지 4개월여가 지난 가운데 당시 시위현장에 있었다는 30대 티베트인이 인도 언론에 당시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
사건발생 당시 티베트 수도 라싸(拉薩) 중심가에서 헌옷과 장신구를 팔던 쿤상 소남(38)씨는 지난 3월 초 라싸 시내에 경찰 병력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라싸를 방문한 캄 부족(네팔 서부에 거주) 사람들이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을 전하면서, 1987∼1988년 유혈사태를 경험한 그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남은 "그들은 마치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 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에 따르면 티베트의 긴장상태는 작년 9월 달라이 라마의 미국 의회 골드메달 수상이 결정될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라싸 최대의 드레풍사원의 승려들은 사원 건물을 도색하고 치장하며 달라이 라마의 수상을 기념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이를 도전이라고 판단해 승려들을 가두고 물품 공급을 끊는가 하면 일부 승려들을 체포했다는 것.
이런 사실은 언로가 막힌 라싸에서도 몇주 만에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난 2월 티베트 새해 첫날인 로사르(Lhosar)를 앞두고 경찰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별일 없이 넘어가는 듯 했던 상황은 그러나 3월10일 시내에 시위대가 등장하면서 급변했다.
3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시내 중심가를 향해 행진하다 경찰의 봉쇄에 막혔고, 이튿날 사원의 전화가 불통되더니 3월12일에는 라싸 시내 모든 전화선이 차단됐다. 소남은 "당시 도시는 폭발 직전의 부싯돌이 든 통 같았다. 14일 내가 친구와 함께 라싸 북쪽 세라사원를 방문했을 당시 이미 시내 중심가 라모체 사원에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사원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시민들이 동참했다"고 말했다. 소남 역시 300∼400명에 달하는 시위대에 동참해 '우리는 자유로운 티베트를 원한다', '참파(티베트식 보리 빵)를 먹는 모든 사람들은 일어나라' 등 구호를 외치고 30∼40명 가량의 경찰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서 발포가 시작됐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년의 한 남자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어 또 다른 무리의 무장 병력이 거리로 나와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실어갔고 이들이 떠난 자리엔 유혈이 낭자했다"고 덧붙였다. 소남은 친구와 함께 조캉사원이 위치한 바르코르 거리로 향했는데, 이곳의 일부 건물 창문에서는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군중들은 2명의 사망자를 '순교자'로 칭하며 밤 9시까지 시위를 지속했다. 이날의 기록을 두고 중국 당국과 티베트 망명정부는 서로 아주 다른 주장을 펴 왔다. 중국 당국은 이날 사망자가 22명이며 사망자는 티베트 시위대의 폭동 때문에 발생했다고 했다. 반면 망명정부 측은 당초 유혈진압에 의한 사망자가 100명을 넘었다고 발표했고 이어 218명까지 늘었으며 이들의 신원을 공개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소남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티베트 폭도들이 한족이 소유한 재산을 약탈했으며, 이에 대해 중국 정부가 아주 잔인한 진압을 통해 국가의 힘을 과시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세라 사원으로 돌아간 소남은 군 당국의 통제하에 이틀을 사원에 갇혀 지냈으며, 사원에서 풀려났을 때는 라싸 시내에 경찰 초소가 넘쳐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소남은 1년 전에 신청했던 네팔 방문비자를 4월26일에 발급받은 뒤 카트만두를 거쳐 이틀 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로 들어왔다. 소남은 인도 일간 힌두스탄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내 임무는 당시 라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 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며 "내 입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유혈사태를 계기로 티베트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시위는 한층 격렬해졌으며, 더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특파원 meolakim@yna.co.kr (뉴델리=연합뉴스)
3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시내 중심가를 향해 행진하다 경찰의 봉쇄에 막혔고, 이튿날 사원의 전화가 불통되더니 3월12일에는 라싸 시내 모든 전화선이 차단됐다. 소남은 "당시 도시는 폭발 직전의 부싯돌이 든 통 같았다. 14일 내가 친구와 함께 라싸 북쪽 세라사원를 방문했을 당시 이미 시내 중심가 라모체 사원에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사원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시민들이 동참했다"고 말했다. 소남 역시 300∼400명에 달하는 시위대에 동참해 '우리는 자유로운 티베트를 원한다', '참파(티베트식 보리 빵)를 먹는 모든 사람들은 일어나라' 등 구호를 외치고 30∼40명 가량의 경찰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서 발포가 시작됐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년의 한 남자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어 또 다른 무리의 무장 병력이 거리로 나와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실어갔고 이들이 떠난 자리엔 유혈이 낭자했다"고 덧붙였다. 소남은 친구와 함께 조캉사원이 위치한 바르코르 거리로 향했는데, 이곳의 일부 건물 창문에서는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군중들은 2명의 사망자를 '순교자'로 칭하며 밤 9시까지 시위를 지속했다. 이날의 기록을 두고 중국 당국과 티베트 망명정부는 서로 아주 다른 주장을 펴 왔다. 중국 당국은 이날 사망자가 22명이며 사망자는 티베트 시위대의 폭동 때문에 발생했다고 했다. 반면 망명정부 측은 당초 유혈진압에 의한 사망자가 100명을 넘었다고 발표했고 이어 218명까지 늘었으며 이들의 신원을 공개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소남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티베트 폭도들이 한족이 소유한 재산을 약탈했으며, 이에 대해 중국 정부가 아주 잔인한 진압을 통해 국가의 힘을 과시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세라 사원으로 돌아간 소남은 군 당국의 통제하에 이틀을 사원에 갇혀 지냈으며, 사원에서 풀려났을 때는 라싸 시내에 경찰 초소가 넘쳐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소남은 1년 전에 신청했던 네팔 방문비자를 4월26일에 발급받은 뒤 카트만두를 거쳐 이틀 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로 들어왔다. 소남은 인도 일간 힌두스탄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내 임무는 당시 라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 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며 "내 입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유혈사태를 계기로 티베트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시위는 한층 격렬해졌으며, 더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특파원 meolakim@yna.co.kr (뉴델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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