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04 20:53
수정 : 2009.08.04 20:53
중 지도부 한때 권력투쟁 조짐도
후 주석 급거 귀국후 수습
중국 정부 집계로만 197명의 사망자를 낸 우루무치 사태는 중국 최고지도부까지 혼란에 빠뜨렸다. 유혈사태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고, 대책을 놓고 강온파가 격돌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후진타오 주석이 급거 귀국한 것도 이런 혼란이 권력투쟁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하면, 위구르인들의 시위가 한족들과의 대결로 확대되자 공산당 정치국에선 장난감 공장의 민족분쟁으로 시위의 빌미를 제공한 광둥성과, 유혈사태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신장위구르자치구 지도부에 대한 문책론이 제기됐다. 공교롭게도 왕양 광둥성 서기와 왕러취안 신장위구르자치구 서기가 모두 후 주석의 권력기반인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인 탓에 이 논란은 후 주석의 지도력을 훼손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공산당 상무위원들 사이에서도 초기대응 평가와 수습방안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저우융캉 상무위원을 중심으로 한 장쩌민 전 주석 계열은 강경대응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 주석이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한동안 잠복해 있던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한 소식통은 “후 주석 급거 귀국은 이런 정치적 갈등을 우려한 상무위원회의 건의에 따른 것”이라며 “후 주석이 베이징에 들어오고나서야 상황이 수습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후 후 주석을 위시한 중국 최고지도부는 위구르 분리독립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다. 민족단합을 강조하던 태도는 국가분열 행위에 대한 엄단을 공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무위원들 사이에서 강경론이 힘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궈보슝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비롯해 중앙군사위 고위 인사가 이후 잇따라 우루무치를 방문한 데서도 이런 기류를 읽을 수 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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