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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푸젠성 취안저우에 세워진 정화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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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때 28년간 7차례 서양 항해 주도한 인물
평화주의적 성격 재조명 해양권익 고취 움직임도
해양강국 발돋움 위한 의지 담겨
600년 전 중국의 항해가 정화(그림)에 대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요즘 중국 곳곳에서 한창이다. 정화는 명나라 영락제 때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수백척의 배를 이끌고 일곱차례에 걸쳐 서쪽 바다를 누비고 다닌 이른바 ‘남해 원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중국 정부는 정화가 첫번째 남해 원정의 닻을 올린 7월11일(음력 6월15일)을 ‘항해일’로 선포하고 지난 1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화 남해 원정 600돌 기념식’을 열었다. 베이징 국가박물관에서는 전시회를, 상하이에서는 국제해양박람회를 벌이고 〈정화 남해 원정 기념총서〉(전 4권)와 기념 우표도 만들었다.
600년 기념행사를 위해 중국 정부는 이미 2001년부터 교통부, 중앙선전부, 문화부, 국가문물국 등 관련 부처가 연합해 ‘정화 남해 원정 600돌 기념 활동 주비 영도소조’를 구성해 준비해 왔다. 준비팀이 정한 행사의 주제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고(열애조국), 이웃과 우호를 나누며(목린우호), 항해 과학을 발전시킨다(과학항해)”였다.
중국이 해양 영웅 ‘정화’를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나선 데는 해양강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
황쥐 부총리는 11일 열린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통해 “중국은 육상대국이자 해양대국”이라고 전제한 뒤 “해양사업을 크게 발전시키는 일은 국가안보, 주권 보호, 자원과 환경 보호, 경제사회 발전 촉진을 위해 매우 커다란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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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푸젠성 취안저우에 세워진 정화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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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보다 90년 앞서 바닷길 개척 배 62척에 2만7천명 태우고 인도·아프리카등 방문 중국 역사상 최고의 해양 영웅인 정화(1371~1435?)는 이슬람계 후손인 윈난성 사람이다. 명의 3대 황제인 영락제가 즉위하기 전 그의 환관으로 들어간 정화는 영락제의 황위쟁탈전을 도와 그의 신임을 얻었다. 당시 명의 북방에는 몽골족의 티무르제국이 강성해 육로 비단길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락제는 정화에게 명을 내려 서역으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를 ‘정화의 서쪽바다 항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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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기록을 보면 정화는 키가 7자(약 2.1m)의 거구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배를 건조하는 일을 지휘하고 62척의 배로 선단을 구성해 2만7000명의 선원, 군인, 상인, 통역, 의사 등을 태우고 1405년 남해 원정에 나섰다. 이후 1433년까지 28년 동안 그는 모두 7차례에 걸쳐 대항해를 하면서 ‘바다의 비단길’을 개척했다. 1~3회 때는 인도의 콜카타 인근 지역까지 항해했고, 4~7회 때는 인도 호르무즈에 본대를 진주시킨 뒤 별대를 더 서쪽으로 보내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탐사하고 돌아오도록 했다. 정화의 원정대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타이, 인도, 아프리카 일대의 30여 지역과 국가를 방문한 뒤 명나라와 ‘조공 무역’ 관계를 맺도록 설득했다. 귀국하는 길에는 사신들의 배와 동행하기도 했다. 정화의 원정은 시기적으로 콜럼버스의 미주대륙 도착(1492년)이나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항해(1498년)보다 90년 앞선 것이다. 선단의 규모도 콜럼버스(3척, 선원 100명)나 바스코 다 가마(3척)를 압도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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