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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2 10:08 수정 : 2006.03.12 10:08

대량학살과 전쟁주도 혐의로 기소된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연합뉴스

헤이그에 있는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감옥에서 사망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64)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지난 90년대 악명높은 '인종청소'로 발칸반도를 공포에 떨게했던 독재자다.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 발칸 전역에서 전쟁과 학살을 자행, 20만명을 숨지게 하고 300만명을 난민으로 만들었으며 유고 경제를 파탄시켰다.

그러나 그는 권좌에서 물러나 전범 재판에 회부된 뒤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참혹한 만행으로 평가되는 자신의 죄과에 대해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은 채 혐의를 부인하다가 재판이 끝나기 전에 결국 숨을 거뒀다.

1941년 8월20일 세르비아 동부 포자레바치에서 그리스 정교 성직자와 열렬한 공산주의자 교사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1962년에, 어머니는 1973년에 각각 자살하는 비극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1964년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며 공산주의자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티토 대통령 시절부터 온건한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한 그는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정치적 기술을 익혀나갔다.

1984년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세르비아 공산당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87년 4월에는 코소보에서 소수인 세르비아계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 강력한 지지를 받는 민족주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해 스탐볼리치의 뒤를 이어 공산당 당수가 된 그는 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뒤 대 세르비아주의를 제창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킨 그는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유고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야기했다.

밀로셰비치는 1997년 유고연방 대통령에 올라서도 철권 통치를 휘둘렀으며 결국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인종청소,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 공습 이후 국민적 저항이 거세진 가운데 2000년 10월 13년간 유지해온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199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당시 서방이 경제제재 압력을 가하자 협상에 나서 데이튼협정에 서명하고, 코소보 사태 때에도 수차례 나토와의 협상에 응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2000년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체포된 그는 2001년 6월 전범재판소 법정으로 인도돼 이듬해부터 재판을 받아왔으나, ICTY를 '승리자의 재판'이라고 무시하고 "조국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한 모든 것들이 자랑스럽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영국의 BBC 방송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며, 이로인해 발칸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숨쉴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권혁창 특파원 faith@yna.co.kr (부다페스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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