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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생일에 우리의 전쟁 시작된다” “모든 외국인은 떠나라”
인종혐오 범죄, 6만 스킨헤드가 주도
집시·아시아인 등 비슬라브인 ‘표적’
4월에만 9명 피살…경찰은 “단순범죄”
러시아에 사는 비슬라브 민족들이 ‘잔인한 4월’을 보내고 있다. 올 들어 인종혐오 범죄가 20여건 발생했고, 이달 들어서만 9명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모스크바타임스>는 지난 22일 모스크바 지하철 푸슈킨스카야역에서 아르메니아계 학생 바간 아브라먄츠(17)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한 고교생이 체포됐다고 25일 보도했다. 당시 사건 목격자들은 삭발에 검은색 옷을 입은 스킨헤드족 7명이 전동차에서 내려 갑자기 아브라먄츠와 일행에게 덤벼들었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3일에는 모스크바 동부에서 괴한들이 타지키스탄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1명이 숨지고, 다른 이는 중태에 빠졌다.
이런 폭력은 슬라브계나 백인을 우월한 존재로, 다른 민족은 열등하고 해악적인 존재로 여기는 정서에 터잡고 있다. 공격 대상도 옛 소련에 속하던 중앙아시아 출신이나 집시, 아시아·아프리카 출신들이다. 대표적인 피해자들이 히틀러의 인종청소 대상이 되기도 했던 집시들이다. 지난 13일에는 볼시스키의 집시 집단거주지를 습격한 스킨헤드족 15명이 쇠파이프를 휘둘러 2명을 숨지게 하고, 14살 소녀와 80살 할머니에게 중상을 입혔다. 3일 뒤에는 프스코프에서 20대 집시 형제가 총탄에 희생됐다. 근처에서는 지난해 9월 한 집시가 납치, 살해된 일이 벌어졌다. ‘자유 러시아’라는 단체는 이 사건 직후 ‘청소’에 필요하니 집시들의 이름·주소를 알려 달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뿌렸다.
이달 초에는 베트남계 상인이 10대들의 집단 폭행으로 숨졌고, 세네갈 출신 유학생은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비슬라브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20일 모스크바에서는 6∼8명의 젊은이들이 슬라브인 학생 알렉산드르 류힌(19)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살해 동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반인종주의 운동에 참여해온 류힌이 ‘표적 살해’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변을 당한 세네갈 유학생도 반인종주의 활동을 해왔다.
소련 붕괴 후의 혼란과 슬라브 민족주의 발호 속에 싹튼 인종혐오 범죄는 6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스킨헤드족이 주도한다. 스킨헤드족은 소수민족에 대한 우월감과, 이들의 존재에 ‘신분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백인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일부는 히틀러를 숭배한다. 지난 19일에는 ‘스킨헤드 워’라는 제목의 전자우편이 곳곳에 보내졌다. 이 전자우편은 “히틀러 생일(4월20일)부터 우리의 전쟁이 시작된다”며 “모든 외국인은 떠나라. 떠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유럽 러시아’에서 빈발하는 인종혐오 범죄는 우랄산맥을 넘어 차츰 시베리아와 극동까지 번지고 있다. 이 때문에 연해주를 찾는 중국인이 급감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치안당국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표정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검찰은 지난해 발생한 1079건의 외국인 상대 범죄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금품을 노린 범죄로 판명났다며, 단 2건만이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최근 주장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주러 한국대사관 ‘각별한 주의’ 당부 러시아의 인종혐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현지 한국대사관은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이달에도 몽골인이나 중국인 등 아시아인들에 대한 집단폭행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은, 히틀러 생일인 4월20일부터 그의 사망일인 4월30일, 5월9일 러시아의 2차대전 전승기념일을 전후해 스킨헤드족이 더욱 준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올해 들어서는 특별한 한국인 피해 사례가 없지만, 지난해에는 유학생과 여행객에 대한 집단폭행 사건이 3건 일어났다고 대사관은 밝혔다. 그중 2건이 스킨헤드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파악됐다. 대사관은 이에 따라 러시아 거주자나 여행객은 야간외출을 삼가하고, 젊은이 등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에서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휴대전화 등의 물건을 내보이지 말 것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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