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따노(Gitano) 또는 찌가노(zigano)는 이집트에서 왔다 : 짚시들은 아랍족의 침입이후 이집트에서 탈출한 콥트(copt)족과 오랫동안 혼동해 왔다. 왜냐하면 이들은 도망쳐다니는 민족으로 항상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롬(Rom)은, 아담처럼 죄를 지은자를 말하고자 하지만, 또한 단순히 인간을 의미한다. 왕을 가진 중심 짚시 민족들이 자신들을 지명하는 말이다. 신띠(Sinti)는 더욱 순수 인도유럽적 기원의 용어이고 그 이름하에서 다른 짚시들은 그 자신의 민족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남비장이 (Calderas), 류트를 만드는 자(laudari, 일종의 악기), 말사육자 (lovara) 등으로서 각 자의 부족을 나타내었다. 보헤미안(Bohèmien )은, 비참함속에서, 자신의 예술 또는 자신들의 열정에 사는 이들의 동의로 변했다; 하지만 초기에 보헤미안은 짚시로 불려졌었고 보헤미아 왕의 칙령으로 짚시들에게 주위를 돌아다니고 자율적으로 법을 관장하는 자유를 주었다. 걷는자들(Camminanti)는 시칠리아에 사는 짚시들의 이름이다. 유랑자(Nomad)는 관료적이면서 경찰적 용어이고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명명되었다. 그들의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역사이다. 여기에 실은 기록은 그들이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관찰한 유럽인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950년 경 하마즈 이븐 하산 알 이스팔라니(Hamaz ibn Hasan-al-Isfalani)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왕 베흐람 괴르(Behrâm-Gör)는 그의 신하들의 복지를 많이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하루의 절반을 좋은 음악과 곁들여서 휴식·축제·마시는 것 그리고 오락에 헌신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왕국에는 음악가들이 적었고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신하들을 기쁘게 하게 만들기로 결정한 그 페르시아 왕은 인디아의 왕에게 바로 1만2천명의 조트(Zott)족을 보내도록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1011년에 시인 피르두시(Firdusi)는 그 이야기를 다시 썼다. 인디아에서 온 방랑하면서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은 조트라고 불리지 않고 루리(Luri)라고 불렀고, 약간 적은 만여명이었다고 기록했다. 페르시아왕은 그들 각자에게 수송아지, 당나귀 그리고 밀과 수 천개의 일의 부담을 주었다. 왕은 그들이 번 것으로 농지를 개간하기를 바랬고, 그래서 돈을 받지 않고 연주를 해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들은 곡식을 심는 대신에 모두 먹어버렸고 이렇게 해서 말년에, 다시 왕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탕진했고 얼굴들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왕은 그들에게 방랑하면서 연주하면 살아가도록 선포했다고 한다.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짚시가 처음으로 유럽에 나타난 것은 1000년경으로 기록되고 있다. 롬(Rom), 신띠(Sinti), 깔레(Kalè), 만누쉬(Manush)의 첫 조상들이 박해를 피해 인디아에서 이동해왔다고 한다. 그들의 첫 정착은 1054년으로 그리스에 기록되고 있다. 1492년에 카톨릭 신자인 아라곤 왕의 박해로 모리(Mori)인들과 유태인들과 함께 스페인에서 내쫓겨졌다. 1554년에 영국과 스웨덴은 짚시들에 대한 사형을 법령화했다. 1682년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짚시를 억압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했다. 1758년에 계몽주의자들은 짚시들을 융화시키고자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 여왕은 동화법을 최종적으로 인준했다. 짚시 어린애들은 국가의 관리하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해 짚시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떼어지게 되었다. 1925년 스위스 정부는 짚시 민족의 정착을 강제화했다. 50여년 동안 적어도 629명의 짚시 어린애들이 그들의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져서 각 종의 권력 남용과, 성적 남용을 포함한, 폭력을 하는 영구 가족, 고아원, 정신병원 등에 보내졌다. 반면에 많은 짚시 여자들은 강제로 불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종 말살은 Pro Juventute 라는 조직단체에 의해 정부의 후원과 함께 진행되어졌다. 1940-45년 사이에 나찌에 의해 강제 수용소에서 500.000 명 이상이 말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된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전후 나찌 전범의 재판이 열렸던 노림베르그(Norimberg) 에 짚시들은 증인으로서 출석되지 못했다. 1979년 유럽 위원회는 각 정부에 짚시의 문화를 보호하도록 권고했다. 2005년 유럽 연합(EU)은 짚시는 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노마디(Opera Nomadi)에서 2006년 9월에 갱신한 자료에 의하면 15만명의 짚시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 자료는 그리 확실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중 7만명은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고, 8만명은 발칸 반도와 동유럽 국가에서 온 것으로 분석된다. 15만명 중 60%는 18살 이하의 나이를 가진 롬과 신티이고, 이들 중 2만명은 12살 이하의 나이를 가졌고 학교도 가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첫 롬과 신티는 1400년에 오토만 제국에서 빠져나와 이탈리아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1800년대에 이동이 있었고 1900년에 루마니아에서 짚시의 노예제를 폐지함으로서 다시 이동이 있었다. 1966년과 1992년에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동해왔다. 또한, 폴란드, 체코 공화국, 몰다비아, 헝가리에서 온 짚시들이 있고 최근에는 루마니아에서 짚시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들로 불려지고 있다. Romanès, Porrajmos, Kalderasha(이탈리아 짚시), Khorakhanè(이슬람 짚시), Dasikhonè(정통교 짚시)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들 자신에 대한 자부심, 운명으로서의 죄를 지은자, 선택으로서 다른 이들과 구별되고, 중세에서 부터 나찌즘과 코소보 등의 모든 박해을 넘어왔다. 짚시의 언어에서 “manghel을 한다”는 것은 구걸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애들은, 종종, 그들의 부모와 함께 구걸을 한다. 왜 놀지않고 학교에도 가지않는가? 낯선이들에게 그들의 진짜 이름조차도 알려주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 말할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자들에게도 단 한가지만 묻는다. ‘잊어 먹혀지도록 놔두어라. 왜냐하면 남아있는 혹은 살아있는 자는, 기억에서 해방된, 영원한 현재에서 살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언어에 내일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박해를 받아오면서도 유럽 사회에 동화하지 않는 이유를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이것들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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