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연맹의 내부에 나치 그룹들을 살도록 내버려 두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억압했다. 1925년에 태어난 공산당은 1940년에 위법으로 선포되었고, 베른 (Berne)에서 선출된 유일한 공산당 하원은 국회에서 축출되었다. 단지 70년대에 그 금지는 법에서 사라졌다. 역사적 동지들 사이에서는 공산당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표를 잃는 행위이고 투표자들의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칸톤(Canton), 프랑스어권 지역과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노동당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1944년에 공장노동자와 농부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었다. “붉은 잉크”의 편집자는 “노동”이라는 말보다 공산주의자라는 말에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당의 젊은 층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내의 다수멤버가 채택한 긴급 동의(motion)에 따르면, 현실 사회에서 “노동”의 용어는 소수의 특권으로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더욱 냉대받는 사회계급의 현실의 한계적인 요소일 수 있다. 그리고 개척적 동지들이 자유로운 의사로 선택한 것은 공산당이라는 이름이 아니다. 대중들은 또한 명칭 (denomination)의 분명성을 요구한다. 스위스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당 (liberal party)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당에, 민주기독당은 대중 (popolari)당으로, 민족-파시스트들은 민족주의당 (Nationalist)에 각각 돌아가고 있다. 단지 왜 공산주의자들만이 공산당이라고 불려지는 것을 두려워해야만하는가라고 반문한다. 2007년 9월에 그리스에서 8,1%의 투표로 작은 그리스 공산당 (KKE)은 국회에서의 의석수를 두배로 증가시켰다. 이 공산당은 “자본주의와 미국 식민주의” 에 대한 저항의 선도자로서 제시한다. 이 당은 1918년에 설립되었고, 1936년에 복건된 메탁사스 (장군의 파시스트 독재하에서 탄압받았고, 40년대 뭇솔리니의 공격 이후 폐쇄되었다. 그 이후, 해방의 민중적 국민군 (ELAS)와 해방민족 전선 (EAM)에 의해 책임되고 지휘된 저항의 중심 그룹으로 변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의해 지지된 그리스 정부에 반대해서 해방의 민중적 국민군에 결집했다. 시민전쟁은 1949년까지 지속되었고, 공산당은 산산분해되었다. 탄압은 많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를 떠나도록 만들었다. 1952년 세계(주로 유럽)가 니코스 벨로이안니스(Nikos Beloyannis)를 위해 동원되었다. 그는 공산당의 불법성을 제재하는 법의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37살의 지도자는 3월 30일에 처형되었다. 군사법정의 멤버들에는 군사 정부의 미래 우두머리인 대령 파파도풀로스(Georgios Papadopoulos)가 있었다. 군사 정권은 1967년 4월 1일에 쿠테타에로 권력을 장악했고, 1974년까지 그 권력은 지속되었다. 1974년 군사 정권의 종언과 함께 당시 수상인 카라만리스(Karamanlis)의 역사적인 결정으로 공산당은 합법화되었다. 1968년에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에의 침략으로 인한 고립에서 생존한, 공산당은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 등장하게 되었다. 1989년에 레프트의 연합인 시나스피스모스(Synaspismos) 에 참여했지만, 3년 후에 그 연합에서 나왔다. 1993년 이후 국회에서 의석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리스 스릴러 작가인 페크로스 마르카리스(Petros Markaris)는 “공산당의 성공을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 당은 작은 고기들에게 특권을 주는 선거 체제와 국민의 실망으로 표를 얻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리스는 최악의 상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붐은 국가의 도덕적 의미를 마취시켰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투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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