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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스레브레니차 부근 포토차리 묘지 관계자들이 1995년 내전 중 세르비아계 군인에 학살된 뒤 집단 매장됐다가 최근 발굴·수습된 이슬람계 주민 610여명의 관을 10돌 기념일인 11일 매장하기 위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다. 포토차리/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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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패권 위해 보스니아 25만명 살육
집단윤간에 10대 소년들까지 무자비한 총살
“유엔·나토 무기력” 비판…전범재판 지지부진 11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서 동쪽으로 80㎞ 떨어진 스레브레니차에선 만 10년 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자행된 대규모 학살에 대한 추모와 함께 최근 발굴·수습된 610구의 주검 안장식이 치러졌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5만명의 추모객 가운데는 보스니아 내전 종식을 이끈 데이튼 평화협정의 입안자인 리처드 홀부루크 전 미국 보스니아 담당 특사와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대통령, 그리고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외무장관 등이 참석했다. 또 보리스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논란 속에 처음으로 기념식에 참석해 추모행렬에 동참했다. ◇ 인종청소의 현장=보스니아 내전 발발 3년째인 1995년 7월11일 세르비아계 군총사령관인 락토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내 이슬람계 거주지역인 스레브레니차로 진입했다. 당시 세르비아계의 점령지역 시아에 고립된 스레브레니차는 유엔 평화유지군에 의해 안전지대로 보호받던 지역이었다. 믈라디치 장군 군대의 무기 반납과 항복을 촉구하면서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평화유지군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인종청소로 기록된 5일 동안 학살극에서 잠재적 전투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소년을 포함해 8천명의 이슬람계 남자들이 살해됐다. 지난달 초 헤이그의 유고전범재판소에 전 유고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대학살 혐의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된 비디오 테이프는 세르비아계의 잔혹성에 새삼 치를 떨게 했다. 스레브레니차에선 지금까지 5천구 이상의 희생자 주검이 발굴됐고, 아직도 희생자들이 대량 매장된 20여 곳이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2년 시작됐다.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5%, 크로아티아계 18%였던 보스니아의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유고로부터 독립을 원했지만, 세르비아계는 베오그라드가 이끄는 유고와 합쳐 ‘대세르비아’를 원했기 때문이다. 95년 말 파리에서 열린 ‘데이튼 협정’으로 막을 내린 4년 동안의 보스니아 내전은 25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인구 400만명 가운데 40%가 난민화하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후 스레브레니차 등 곳곳에서 암매장된 2만여구의 주검이 발굴됐고, 현재도 발굴작업이 계속되는 등 내전의 상흔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1만7천여명이 아직도 실종상태다. ◇ 지지부진한 유고전범재판=유고전범재판소(ICTY)는 93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827호에 따라 옛 유고연방 영토에서 발생한 전쟁범죄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세워진 특별법정이다. 재판소는 59명을 기소하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9명의 재판이 벌어지고 있으나,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믈라디치와 세르비아계 지도자인 라도반 카라디치 등 10명은 세르비아 정부 등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고 10년째 도피 중이다. 수년째 계속되는 밀로셰비치에 대한 재판은 정치재판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유고전범재판소(ICTY)는 1993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 827호에 따라 옛 유고연방 영토에서 발생한 전쟁범죄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세워진 특별법정이다. 재판소는 59명을 기소하고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9명의 재판이 이뤄지고 있으나,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믈라디치와 세르비아계 지도자인 라도반 카라디치 등 10명은 세르비아 정부 등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고 10년째 도주중이다. 수년째 계속되는 밀로셰비치에 대한 재판은 정치재판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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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을 통해 유엔 등 국제사회는 학살을 방관하고 뒤늦게 개입하는 등 제구실을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뒤늦게 투입된 유엔 평화유지군도 내전을 끝내게 할 능력이 없었다. 스레브레니차에 주둔했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은 100여명에 불과했고,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을 선별해 넘겨주기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데이튼 평화협정 때도 더는 국경선을 그릴 수 없다며 내전 전과 같이 세 종족 또는 세력을 묶어두는 미봉책을 선택했다. 지난 4월 네덜란드 정부는 유엔 평화유지군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등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에 공동책임이 있다는 자체 보고서가 나온 이후 내각이 총사퇴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네덜란드의 용기’라고 칭찬한 바 있다. 김학준 기자 kimh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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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는 어떤 나라?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세르비아 왕국은 1918년 1차대전이 끝난 뒤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바뀌었다. 1929년에는 국명을 ‘남부 슬라브 민족의 땅’이란 뜻의 유고슬라비아로 바꿨다. 유고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나치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요시프 티토의 지도력 아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의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재탄생했다. 크로아티아 출신인 티토는 강력한 리더쉽으로 민족간의 통합을 추진해 어느 정도 안정을 이뤘다. 그러나 80년 티토 사망 이후 세르비아의 독주에 반발하는 공화국들의 반발이 터져나오기 연방의 균열이 시작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정부들이 잇달아 무너지던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고 연방을 이탈했다. 이들 공화국은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주도 연방과 전쟁을 벌여 결국 독립국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어 92년 세르비아계가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하면서 세르비아계와 이슬람계간의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다. 알바니아계 중심의 코소보 자치주도 1998~1999년 내전을 거쳐 사실상 떨어져 나갔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만이 남게 된 유고연방은 2003년 느슨한 국가연합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국명이 바뀌어 유고연방이란 국명조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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