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6.03 13:16
수정 : 2012.06.03 14:43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다이아몬드 쥬빌리’ 열려
3일 오후 2시(현지시각) 영국 런던 템스강에는 엘리자베스 2세(86) 영국 여왕과 남편 필립공(91)이 탄 왕실 바지선이 뜬다. 지난 2월6일 시작된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행사 ‘다이아몬드 쥬빌리’의 클라이막스다. 영국 각지에서 모여든 1천여척의 배가 여왕 부부를 호위하며 7마일(약 11.26km)을 이동하는 장관을 연출할 예정이다. 템스강 주변에는 100만명 이상이 모여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선박 행렬을 구경하고 여왕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것으로 보인다. 2~5일 나흘간의 임시공휴일 첫날이었던 2일에도 여왕은 영국 최고 경마대회인 엡섬더비를 참관하면서 15만명의 시민들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확인했다. 런던과 에든버러, 카디프, 벨파스트 등 주요 도시에서는 축포가 울려 퍼졌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26년 조지 6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로 태어났다. 이때만 해도 ‘여왕’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윈저공)가 왕위 대신 미국인 이혼녀 심슨 부인을 선택하면서 메리는 극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운명을 떠안게 됐다. 1936년 메리의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받았고, 1952년 2월6일 부친의 죽음과 함께 영국의 40번째 군주이자 8번째 여왕이 됐다. 대관식은 이듬해 6월2일 치러졌다. 영국이 2일을 성대한 기념행사의 첫날로 잡은 이유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837년부터 64년간 영국을 통치한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왕위를 유지하고 있다. 윈스턴 처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까지 여왕을 거친 총리만 12명에 이른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뀐 재위 기간 동안 영국도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보도를 보면, 1952년 5050만명이었던 영국 인구는 2012년 현재 6310만명으로 늘었다. 국내총생산은 3770억파운드에서 1조5610억파운드로 불었다. 즉위 첫해 태어난 남자 아이의 기대수명은 66살이었지만 지금은 77살이다. 다만, 97만2174명에서 49만8433명으로 줄어든 공무원수, 37만9000명에서 265만명으로 늘어난 실업자수는 그 기간 팍팍해진 영국의 살림살이를 짐작케한다.
영국의 대외적인 위상과 영향력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52년 아프리카와 중동 등지에 70개가 넘었던 국외영토는 15개로 쪼그라들었다. 한국과 케냐, 이집트, 말레이 지역 등에서 복무했던 87만1700명의 영국군은 17만10명으로 줄었고, 아프가니스탄에만 파견돼 있다.
이런 변화들 속에서 왕실이라는 ‘세습된 특권’이 대중적인 지지를 유지해 왔다는 건 영국에서도 놀랍게 여기는 일이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의회와 지자체, 언론, 경찰 등 다른 기관들에 대해 냉소적인 영국인들이 도대체 왜 군주제에 대해서만 그렇게 충성스러운 채로 남아있는가” 의문을 표했을 정도다. 여론조사 기관 <입소스 모리>의 조사결과를 보면, 군주제 대신 공화제를 원하는 영국인 비율은 1969년 18%, 1993년 18%, 2002년 19%, 2011년 18%로 큰 변화가 없었다. 무응답이나 기타 의견을 제외하고 영국인 4분의 3은 여전히 군주제를 지지한다. <가디언>이 지난주 보도를 보면, 22%의 영국인들만 군주가 없으면 영국이 더 좋아질 것으로 내다봤고, 69%는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여왕과 왕실에 대한 영국인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사랑은 역설적으로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추락하는 영국의 위상과 관련이 깊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전쟁에서 이겼지만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힘과 위상은 미국에 내줬다. 1950년대 영국은 어떻게 미국화 되는 세계정세에 적응할 것인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또 가족과 사회를 뒷받침하던 전통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공포도 있었다. 군주제는 너무 빠르고 공포스러운 변화에 대한 보호막, ‘안정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군주제에 대한 열렬한 지지는 전후 영국 정치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분석도 있다.
물론 국가에 대한 여왕의 헌신과 지혜로운 처신이 영국인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여왕은 2차 대전 당시 국왕이었던 조지 6세를 졸라 여자 국방군에 입대했을 정도로 일평생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잃지 않았다. 1976년 20세기 왕실 핵심 일원 최초로 동생 마거릿 공주가 이혼하고, 17살 연하 정원사 견습생과 사랑에 빠지면서 첫 번째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 1996년 아들 찰스 왕세자 부부의 이혼, 이듬해 며느리 다이애나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최대 고비를 맞았지만, 여왕은 “다이애나의 삶과 그녀의 죽음에 대한 (국민들의) 놀랍고 가슴뭉클한 반응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는 침착한 대국민 성명 발표 뒤 자중의 시기를 거치며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 영국의 독특한 국가정체성에서 이유를 찾는 시각도 있다. <비비시> 방송은 영국의 사상가 월터 배저트의 말을 인용해 “영국인들의 정체성은 곧게 뻗은 미국 고속도로의 실용주의 대신 시골의 굽은 B급 도로에서 나타난다”며 “정부 시스템에서도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별난 것, 오래되고 복잡한 것에서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어떻게 우연한 출생에 근거한 특권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와 같은 이성에 근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대해서는 안 되고, 영국의 군주제는 ‘영국만의 군주제’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영국 내에서도 이러한 특수한 국가 정체성과 정치 시스템에 대한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6년 공식 압력단체가 된 군주제 반대 단체 ‘공화국’의 회원들은 ‘다이아몬드 쥬빌리’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3일에도 “9560명의 간호사들입니까 1명의 여왕입니까?”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군주 1명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9560명의 간호사를 고용할 수 있으니, 군주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공화국’은 2010년 회원이 9천명이었으나,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성대한 결혼 이벤트 이후 회원수가 2만1000명으로 늘기도 했다. 이 단체 대표 그레이엄 스미스는 <비비시> 인터뷰에서 “우리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선출된 국가수반을 가진 공화국 의회를 갖길 원한다”며 비민주적인 군주제를 국민투표로 바꿔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스미스는 “군주제 지지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그 이슈가 과거에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며 지속적으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겠다는 목표를 밝히기도 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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