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03 15:13
수정 : 2012.12.0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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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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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의 이미지는 과음과 격무, 조국을 위해 전쟁할 준비가 돼있는 용감무쌍함 아니었나? 그런 한국 남성들이 얼굴에 스킨·로션도 모자라 파운데이션까지 바르는 건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3일(현지시각) 한국의 마초적인 남성 문화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남성용 화장품 인기의 ‘연결고리’로 갈수록 치열해지는 취업경쟁을 꼽았다. 대중적인 파운데이션의 일종인 비비크림이 남성 트랜드가 되고, 남성 화장품 광고가 여성 화장품과 방송시간을 다투며, 남성 외모 가꾸기 프로그램들까지 생겨나는 배경에는 ‘외모도 실력’이라는 경쟁의 한 단면이 반영돼 있다는 지적이다.
런던에 본부를 둔 시장 조사기관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의 통계를 보면, 한국의 남성 화장품 시장은 지난해 10% 성장했다. 아모레 퍼시픽은 이를 14%로 추산한다. 시장 가치는 연 9억달러(약 9750억원) 수준이다. 전세계적인 경기불황을 감안하면 더욱 도드라지는 상승세다.
특히 외국인들의 눈에 이는 무척 특이한 현상으로 비친다. <비비시>는 “한국의 2년 의무군복무제와 유교사상은 남성들에게 전통적인 성역할 관념을 갖게 했고, 젊은 여성들의 불평도 많다. 그런데 한국의 주요 화장품 회사들은 한국 남성들의 또다른 측면을 본다. 한국 남성들은-심지어 파운데이션에 이르기까지-스킨케어 제품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비비시>는 경영학을 전공하는 26살 남학생 유진씨를 인터뷰했다. 그는 페이셜 클렌저와 노화방지 크림, 아이크림 등 5가지 화장품을 사용한다. 비비크림도 얼굴에 바른다. 유진씨는 “여드름이 심한데, 비비크림을 바르면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사람들이 더 핸섬해 보인다고 한다”고 말했다.
비비크림은 원래 성형외과에서 환자들의 수술자국을 감추기 위해 사용해왔다. 지금은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매일 사용할 수 있는 피부 커버용 화장품으로 널리 홍보되고 있다. 메이크업용이라는 언급은 적지만, 베이지색 비비크림은 파운데이션의 기능을 갖고 있다. 자외선을 차단해주고, 잡티를 커버해주고, 피부톤을 진정시켜주기도 한다. 유진씨는 “군에 있을 때 비비크림을 쓰기 시작했다. 군인이 되면 햇볕에 항상 노출되는데, 비비크림은 선블록 효과가 있다. 나는 많은 한국 남성들이 군복무를 하면서 이런 것을 접하게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비비시>는 한국의 옛 장성들이 유진씨의 말을 듣는다면 무덤에서 한탄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아모레 퍼시픽은 젊은 남성 중 20% 정도가 ‘파운데이션류’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 더구나 신세대 젊은 남성들의 화장 문화는 마초적이고 경쟁적인 문화와 충돌도 없다.
아모레 퍼시픽 관계자는 “서구에서 남성이 화장을 하거나 남성들이 화장품 가게로 떼지어 걸어들어가면, 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상황은 다르다”고 전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설명하면서 몇해 전 눈길을 끌었던 ‘외모도 전략이다’ 광고를 예로 들었다. “자신을 잘 가꾸는 것은 경쟁력을 반영하고, 패키지 상품으로서 외모도 가치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에게도 외모는 경쟁우위를 제공한다.”
<비비시>는 이와 관련해, 한국을 선진국 가운데 최장시간 노동을 하는 ‘심한 경쟁사회’라고 소개했다. 또 80%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며, 유명 대기업에 일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도 극심하다고 전했다. 청년 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의 두배라는 슬픈 현실도 덧붙였다.
유진씨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했다. 그는 “나는 남성들이 더 여성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화장한다고 보지 않는다. 남성으로서 상쾌하고 깨끗해 보이길 원한다고 생각한다. 일자리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 더 멋지고 핸섬해 보인다면, 인사담당자들은 더 나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비비시>가 만난 한국 여성들도 ‘화장하는 남자’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서울의 한 화장품 거리에서 만난 여성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멋지게 만들려는 남성들의 노력이다. 나도 예전에 (남자친구한테) 선물로 비비크림을 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비비시>는 다만 아이라이너와 립스틱처럼 좀더 노골적인 ‘화장’에 대해서는 아직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고 전했다. 한 여성은 “내 남동생도 가끔 비비크림을 쓴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자가 아니라면, 아이라이너 같은 화장은 좀 심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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