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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버밍엄시 동부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스파크힐 푸드뱅크’에 구호식량이 쌓여있다. 영국 정부의 복지예산 삭감으로 빈곤층이 늘어 푸드뱅크 이용자가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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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재정 감축해 부실은행 지원
복지 축소로 빈곤층 푸드뱅크로
4~6월 15만명 몰려…작년의 3배 2015년 공공지출 G7 평균 이하
복지 미흡한 미국보다 밑돌듯 연립정권 캐머런 총리
“지출축소가 정책 첫장·첫절·첫줄” 30대 여성 제니퍼(가명)는 영국 중부 버밍엄시에서 아이 둘과 함께 산다. 남편과는 사별했다. 그에게는 정부에서 주는 실업급여가 유일한 수입원이다. 올해 봄까지는 그랬다. 지난 4월에 문제가 생겼다. 정부가 급여를 대폭 삭감했다. 정부의 새로운 기준에 따라 그는 ‘근로회피자’가 됐다. 이제는 어떻게든 시장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우울증을 앓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당장 생계에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에게 무엇이라도 먹여야 했다. 그는 가까운 푸드뱅크의 문을 두드렸다. 버밍엄시 동부의 주택가에 자리잡은 ‘스파크힐 푸드뱅크’에서 만난 사연이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자 이곳을 찾는 발길도 잦아지고 있다. 지난 12일 이곳에서 만난 상근자 가레스 더필드는 “지난해에는 한주에 30가정 정도가 찾아왔다면, 이제는 50가정이 넘게 우리를 찾아온다”고 설명했다. 이 곳만이 아니다. 영국 전역에서 푸드뱅크가 때아닌 성황을 누리고 있다. 영국의 푸드뱅크 ‘트러셀 트러스트’가 11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 4~6월 영국 전역에서 구호식량을 받아간 인구는 어림잡아 15만명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5만명에서 무려 세배로 늘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푸드뱅크를 두고, 데이비드 프로드 노동연금부 차관이 나서 “(푸드뱅크의 수요 증가가) 정부의 정책 변화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명에 나섰다. 물론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적어 보인다. 영국 빈곤층이 푸드뱅크로 내몰린 데는 긴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10년 총선에서 승리한 보수당-자민당 연립정권은 파격적인 긴축재정 구상을 내놓았다. 연립정권은 2015년까지 공공서비스 지출을 357억파운드(64조원)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2010년 영국 정부의 공공서비스 전체 지출액(1660억 파운드)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감축은 파격적인 수준을 넘어, 파괴적이었다. 실업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급여가 177억파운드(32조원)나 줄었다. ‘복지감축’의 파도가 약자들을 덮쳤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재정연구원은 “2차대전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장 거대한 규모로 이뤄지는 공공서비스 지출 삭감”이라고 평가했다. 예산이 급감해 복지 급여 심사가 깐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니퍼와 같은 이들이 국가의 보호에서 떠밀려 시장으로 내몰린 이유다. 이렇게 과격한 복지 감축의 이면에는 연립정권의 다급함이 한몫했다. 영국 재정이 지난 5~6년 사이 급격하게 악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영국이 자랑하던 금융산업은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부실은행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이 들어갔고, 경기침체를 거치며 세수가 주는 등 악재가 이어졌다. 영국 중앙정부의 부채비율은 2007년 42.7%에서 2010년 85.5%로 두배로 불어났다. 보수당-자민당 연립정권이 허리띠를 끝까지 졸라매는 긴축재정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는 명확했다. 복지 부담을 덜어내고, 시장을 활성화해 재정 안정성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1년 연설에서 지출 축소가 연립정권 정책의 “첫장이며, 첫절이고, 첫줄이다”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연립정권의 ‘극약처방’이 영국을 살려내고 있을까. 아직까지는 평가가 부정적이다. 가장 먼저, 연립정권이 활성화하겠다던 시장이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경제협력기구(OECD)의 누리집을 보면,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2010년 이후 단 한번도 회원국 평균을 넘어서지 못했다. 올해와 내년 성장률 전망치도 마찬가지다.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영국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던 일부 국제기구들도 태도를 바꾸고 있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 등과 함께 공동성명을 내어 ‘이제는 영국 정부가 돈을 풀어서 경기부양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경제학)도 “유럽을 지배한 긴축정책은 거대한 실패였다”고 진단했다. 경제를 살리지도 못하는 긴축재정의 부담은 애먼 빈곤층에 집중됐다. 싱크탱크인 재정연구원이 긴축 재정이 빈부에 따라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것을 보면, 소득 상위 10%를 제외하고는 소득이 낮을수록 소득감소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난할수록 피해는 더 컸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원성에도, 연립정부의 드라이브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영국 정부는 현재 정책 기조를 2015년을 넘어 2018년까지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115억파운드의 추가 재정 감축안도 내놓았다. 달리는 말이 지쳐 쓰러질지언정, 채찍질은 멈추지 않겠다는 기세다. 이쯤되면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영국 정부가 이토록 집요하게, 그리고 무리하게 긴축재정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 켄트대의 피터 테일러-구비 교수(사회정책학)는 연립정권의 재정 정책을 분석한 최근 논문에서 정권의 목적이 단순히 ‘복지 삭감’이 아니라, ‘복지 구조조정’이라고 설명했다. “(대처를 포함한) 과거 많은 정권들이 복지 예산 삭감을 시도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과거 정권이 어떤 정책을 써도 복지예산이 3~7년 뒤에는 다시 원래 수준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연립정권은 우려했다. 따라서 정부는 복지 분야의 구조조정과 비용 감축을 통해서 영국 복지모델에 저비용구조를 장기적으로 이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구비 교수의 분석은 최근 <가디언>이 소개한 영국 재무성 대변인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지금 예산안을 두고, 정부가 돈을 아끼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면 핵심을 놓치는 겁니다. 지금이야말로 정부 운영 방식을 바꿔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즉, 현재의 긴축재정 기조는 국가 재정 위기를 넘기려는 ‘응급조치’라기보다는, 복지국가를 위축시키려고 기획된 ‘대수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국의 복지는 매우 빠르게 후퇴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이 2010년 제시한 추정치를 보면, 연립정부의 계획대로 긴축재정 정책이 추진될 경우, 2015년에는 영국의 공공지출 비율이 주요 7개국(G7)의 평균을 크게 밑돌 것으로 예상됐다. 뿐만 아니다. 사상 처음으로 ‘복지 후진국’ 미국의 공공지출도 밑돌게 된다. 테일러-구비 교수는 영국이 가리키는 방향을 ‘월마트 복지국가’로 풀이했다. “영국 복지국가의 여러 특징들-낮은 급여 수준, 엄격한 조건, 노동시장에 참여하도록 하는 강한 인센티브, 민간의 복지 서비스 공급, 사회적 포용의 약화, 불평등의 심화-은 미국의 복지 제도와 닮아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나라, 영국의 복지국가는 미국모델을 따라가려는 연립정권의 기획에 따라 대서양 어디쯤에선가 침몰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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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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