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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는 한·일 역사교육 현장” 나카타니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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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는 한·일 역사교육 현장”
인류 최대 참극의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본어 안내원을 하고 있는 일본인 나카타니 타케시(46)는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한다. 일본인 상대 참극현장 안내
‘엄청난 충격 받고난 뒤 침묵’ 이곳 찾은 일본인의 공통반응
“독일관 폴란드처럼 과거사문제 올바로 해결하고 한·일 협력으로 나아갔으면” “일본에 의해 많은 고통을 받았던 한국분들에게는 이곳이 무척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분들과 많이 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곳은 두 나라 사람들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역사 교육의 현장입니다. 언젠가는 이곳이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공동교육의 현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수용소가 있는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지명)에서 14년째 살고 있는 나카타니의 폴란드와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토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나카타시는 현실 사회주의를 보기 위해 1987년 처음으로 폴란드를 찾았다.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을 직접 현장에서 느끼기 위해 1991년부터 다시 찾은 폴란드에서 폴란드 아내를 맞아 결혼도 하고 아예 정착하게 됐다. “일본 사람들은 패전 뒤에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죠. 우리가 싸워서 얻어낸 자유는 아니었죠. 그래서 일본에서는 민주주의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한국 국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내 자유가 무언지 잘 알고 있어요. 지금 새로운 체제로 전환중인 폴란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체제 속에서 자유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여질까 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오시비엥침으로 오게 된 건 1987년 만났던 폴란드 친구가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안내원이 될 생각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던 기억 때문에 한번은 꼭 찾아보고 싶었던 수용소를 처음 보고나선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다.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수용소가 있는 쪽으로는 다니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폴란드어와 폴란드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실력을 측정하는 셈치고 안내원 시험을 보게 됐고, 1997년에 합격한 이후엔 정식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카타니가 안내한 일본인 관람객들의 반응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어떤 곳이었는지를 잘 알고 온 사람들인데도, 대부분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곤 얘기를 많이 하지 않게 되죠.” 그래서 그는 과거사 문제에 빗대 일본인 관람객들을 안내한다고 한다. ‘전후 60년’이 지났지만 일본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이곳에서나마 다시 한 번 보고 느끼면서 일본에 의해서 겪어야만 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이곳을 방문하는 일본 사람들의 숫자는 한국 사람들만큼 많지는 않지만 수용소를 방문하기 위해서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 달라”고 호소한다. 일본에서는 과거에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고, 사과하는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기분이 좋다고 한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일군 민주화와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다. 그가 언젠가 한·일의 두 나라 사람들이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함께 관람하며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기회는 두 나라 국민들 간의 생각의 차이를 좁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독일과 폴란드가 했던 것처럼 빨리 과거사 문제를 올바로 바로 잡아서 미래의 협력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글 ·사진 아우슈비츠/임성호 통신원 sunislandsungh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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