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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커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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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독일 15년] 통일 주역에게 듣는다 ③ 폴커 브라운
1939년 드레스덴 출생.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불리는 동독 출신 저항시인이자 작가, 극작가, 에세이스트. 그가 동독의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서독의 68세대에 해당하는 동독의 문학세대가 그의 이름을 따 폴커 브라운 세대로 일컬어지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사회주의를 불신하는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 이로 인한 지식인의 고민을 증언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대표작으로 시집 <기쁨의 정원>, 소설 <점령되지 않은 지역>, 극작 <드미트리>, 산문집 <약속이라는 기만에 저항하는 노동> 등이 있다. 1992년 쉴러 기념문학상, 1998년 한스-에리히-노삭 문학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독일 최고의 문학상인 뷔히너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방적 통일 후유증 커대부분 동독인 굴욕감 느껴
자본주의 논리 급히 도입
동독지역 삶의 기반 붕괴
남북한 차이 존중하고
생산적으로 만들어나가야 안성찬=통일 15주년을 맞아 동독을 대표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일의 통일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폴커 브라운=진정한 통일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은 하나의 체제가 다른 체제에 일방적으로 이식되고, 한 지역이 다른 지역에 합병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서독 사회가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제도도 잘 갖추어진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은 많은 문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왔다. 하지만 서독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많은 숙제와 개혁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였다. 통일이 합병의 방식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동독은 물론 서독도 자기혁신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헌법, 새로운 국호,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여 동서독 주민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통일독일의 미래상을 확립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아쉽다. 동독 인문사회과학자 80% 쫓겨나 안성찬=통일 이후 동독인들이 토로하는 불만에 대해 서독인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한 통일인데 왜 그리 불평이 많은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브라운=우리가 통일을 원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통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상호존중에 기반한 통일이었지 일방적인 합병이 아니었다. 우리는 통일독일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대등한 국민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신생 5개주의 주민’으로 불리고 있다. 동독 주민들은 자신들이 통일독일 사회에서 더부살이하는 ‘이등국민’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거의 모든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은 굴욕감이다. 동독 지역의 행정, 교육, 언론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서독인들은 동독체제는 물론 동독 시절의 삶 자체를 죄악시했다. 동독 노동자들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탁월한 교수들과 학자들을 대학과 연구소에서 내쫓는 등 편파적인 조처를 취했다. 동독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자들 중 80%가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를 두고 하이네 뮐러는 “동독의 지적 자산을 소멸시키려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안성찬=동독의 지적 자산에서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브라운=동독의 지식인들은 현실사회주의는 물론 서구자본주의의 한계도 비판해 왔다. 서구의 경제적 풍요는 다른 대륙의 고통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전체를 위한 모델이 되지 못한다. 서구의 풍요는 지구의 자원과 화석원료를 착취하고 낭비하는 생산과 소비 체제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화란 이 착취와 낭비를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시키고 가속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부채를 갚기 위해 계속 아마존의 숲을 베어내야 할 것이다. 유럽과 미국, 한국과 일본 등 이 체제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나라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사라진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타 볼프(독일 사회주의 문화, 여성문학의 기수)의 작품이 미국과 아시아에서 많이 읽히는 것은 그것이 소외되지 않은 삶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한다. 동구권의 지적 자산이 소멸된다는 것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비판적 시야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성찰 없는 맹목적 질주는 커다란 재앙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동구권의 몰락 이후 서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나의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안성찬=동독에서 민주화운동이 한창 고조되던 1989년 10월 당신은 부다페스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반걸음만 내디뎠을 뿐이다. 똑같은 진흙탕에 다른 쪽 발로 서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동독의 지식인들이 민주혁명이라는 여행을 통해 원래 도달하고자 했던 집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다. 하지만 실제로 도달한 곳은 통일독일이었다. 이 결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브라운=민주혁명을 통해 정치적 자유를 얻은 동독 민중이 선택한 것은 스탈린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였다. 그것이 다수의 뜻이었다. 서독 사회라고 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세련된 기능을 지닌 열차에 동승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올라탄 서독이라는 열차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열차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두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땀 흘린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여기에 무임승차한다는 것이 순진한 환상이라는 것, 이 열차에 오르기 위해서는 커다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동독의 민중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안성찬=동독의 민중들이 서독이라는 우등열차에 동승한 대가로 치르고 있는 희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브라운=경제체제의 급격한 변화과정에서 치러야 했던 대가가 가장 큰 것이었다. 독일 정부는 신탁청을 설립하여 인민 소유로 되어있던 동독의 국영기업과 토지를 일반인들에게 매각하는 방식으로 사유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동독의 기업들이 거의 대부분 서독과 서방 기업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동독인들에게는 기업이나 공장을 사들일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따른 생산을 원칙으로 하고 있던 동독의 기업에 자본주의적 경쟁논리를 단기간에 적용한 것이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서방의 기업들이 동독의 잠재적인 경쟁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여 1년도 못가 문을 닫아버린 것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자생력을 지닌 동독 지역 기업들도 도산하고 말았다. 결국 동독 기업의 85%가 사라져버렸고, 대량실업이 생겨나 동독 지역의 삶의 기반이 붕괴되어 버렸다. 서독사회에 무임승차는 순진한 환상 안성찬=서구의 이른바 ‘68세대’에 해당하는 동독의 문학세대가 당신의 이름을 따서 ‘폴커 브라운 세대’라고 불린다. 당신이 동독에서 성장한 첫 세대의 정신과 감수성을 상징하는 작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당신이 이 세대를 대표하게 된 사연에 대해 직접 듣고 싶다. 브라운=그건 그렇게 부른 사람들에게 물어야지 나로서는 대답할 자격이 없다. 그렇게 된 것이 내 책임은 아니지만 용서를 빈다.(웃음) 전쟁의 상처와 과거의 부채를 지니지 않은 우리 세대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한층 자유롭고 정의로운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장벽의 경계를 넘어 동서 양 진영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구의 68혁명과 동구의 프라하의 봄을 말하는 것이다. 동구권의 경우 프라하의 봄에서 나타난 지식인과 민중의 열망은 스탈린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비록 폭력에 의해 좌절되기는 했지만 프라하의 봄이 열어준 역사적 전망은 면면히 이어져 1989년의 변혁을 이루어낸 밑거름이 되었다. 안성찬=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민주적 사회주의의 전망이 흐려진 뒤 ‘멜랑콜리’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정서가 되었다. 볼프 비어만(동독의 시인·음악가)은 멜랑콜리란 “근거 있는 희망과 근거 있는 절망 사이의 감정”이라고 노래한 바 있고, 슬라보예 지젝(정신분석 이론가)은 사라진 환상에 매달려 멜랑콜리에 빠지지 말고 ‘애도’를 통해 그것과 작별하라고 권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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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리 : 안성찬 서강대 강사 (서강대 독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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