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레스보스섬의 가장 큰 도시인 미틸리니 항구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그리스 본토로 갈 수 있는 임시거류증이 발급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전해리 사진가
다큐 사진작가 전해리씨 시리아 난민 탈출 동행기 2
그리스의 레스보스섬 북단 해안가에 도착해서 누릴 수 있는 환희의 시간은 잠시였다. 해안가 인근 마을에서 뿔뿔이 흩어져 모닥불을 피우고 맨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또 다른 고단한 여정의 시작임을 우리 모두는 아침이 되자 절감했다. (▶ 바로 가기: 난민 탈출 동행기 1)
오지 않는 버스…50여㎞ 걷고 또 걷고 카페 들어가다 막는 주인과 말다툼 현지인 건넨 컵케이크에 위로 받기도
시외 난민캠프로 가거나 거리 노숙 ‘택일’ 일주일만에 섬 탈출 티켓 구했지만…
■ 레스보스, 9월2~8일
터키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그리스 레스보스섬에 도착한 첫날밤인 지난 2일 동행했던 난민들이 흠뻑 젖은 옷들을 모닥불에 말리고 있다.
배를 타는 데 집중한 나머지 유럽의 첫 관문인 레스보스 도착 직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대부분 둔감했다. 레스보스섬의 가장 큰 항구도시 미틸리니까지 50㎞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첫 절망감이 몰아쳤다. 지방정부가 난민들에게는 모든 교통수단을 금지했다. 한가지밖에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첫날 밤을 보냈던 마을로부터 대략 10㎞가량을 걸어 도달한 또 다른 마을. 버스 정류장 근처에 수백명이 대기하며 오지 않을 버스를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카페에 내가 들어서자, 주인이 단박에 삿대질과 함께 “너도 저들 중 한명이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도 대들기 시작했다. “똑같이 돈을 내고 서비스를 이용하겠다는데 관광객이든 난민이든 무슨 차이가 있냐”고. 나는 주인에게 난민들과 동행하는 포토저널리스트라고 설명을 했다. 당황한 모습으로 바뀐 그는 하루에 수천명씩 지나가면서 그 마을이 어떻게 변했는지, 또 처음에는 도와줬지만 여름 내내 지속되는 이 행렬에 자신들도 지칠 대로 지쳤다고, 그래서 손해를 볼지언정 나름의 선을 그었다고 말했다. 현지인들의 난민들에 대한 반감은 레스보스섬에 있는 내내 느끼게 되는 일상이었다.
현지인들의 따뜻함을 느낄 기회도 종종 있었다. 바닷가에서 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한 소형차가 우리를 보고 멈춰서더니 컵케이크가 가득 든 상자를 선뜻 넘겨줬다. “힘내서 나머지 구간도 걸어서 잘 가라”고 격려를 해줬다.
미틸리니에 도착한 시간은 대략 오후 5시. 전형적인 그리스의 휴양도시였으나, 빈틈없이 거리를 가득 채운 난민들은 이 도시의 풍경을 기괴하게 바꾸었다. 유일한 난민 등록 사무소가 항구에 있어서, 인근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난민들을 받아주는 호텔은 없었다.
“체류증 내가 먼저”…시리아-아프간 난민이 격돌했다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최대 항구도시 미틸리니에 모여든 난민들이 지난 4일 그리스 본토로 가는 임시거류증을 받으려다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작은 실랑이로 시작된 시리아·이라크 난민들과 아프간 난민들 사이의 싸움은 서로에게 돌을 던지는 대규모 싸움으로 번졌다.
두가지 선택밖에 없다. 하나는 도시 밖에 위치한 난민 캠프다. 시리아인과 이라크 난민 캠프는 항구로부터 약 4㎞ 밖에, 아프가니스탄 등 다른 난민들을 위한 캠프는 10㎞쯤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다른 하나는 도시 안에서 공원이든 길거리든 노숙을 하는 거다.
죽음의 항해를 거쳐 레스보스에 왔다는 기쁨도 잠시 아테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미틸리니까지 50㎞를 걸어야 했다 교통수단은 금지돼 있었다
하루 1천명 난민이 몰려드는데 등록사무소는 몇백명을 처리하고 걸핏하면 문을 닫아버렸다 아프간 난민들은 시리아인들만 특별우대 한다며 불평했다 결국 실랑이가 벌어지고 돌과 파이프가 충돌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구명조끼가 인기 구입품이고, 이곳에서는 값싼 텐트가 그렇다. 한 시리아인이 항구로 가는 것을 지옥에 비유했다. 이를 체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원 노숙을 한 뒤 새벽 6시에 항구에 도착하니 이미 수천명이 몰려 있었다. 항구 안에서 노숙을 하거나, 인근 노숙지에서 새벽 2시께 나와 찾아온 사람들 천지였다. 동이 트자, 더 많은 난민들이 밀려들었다. 인파를 통제할 방법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난민들이 그리스 본토로 가려면, 임시거류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그 증명서는 항구 한쪽의 컨테이너 박스 안에 마련된 창구에서만 내줬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 가족들이 그리스 레스보스섬에서 본토로 가려는 임시거류증을 받으려고 미틸리니 항구에 설치된 임시 등록소를 새벽에 찾아와 기다리고 있다.
며칠간 기다리고도 아무런 소득이 없어 피곤한 난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시리아 난민 수에 버금가는 아프간 난민들은 행정절차가 시리아 난민들에 비해 불공정하다고 불평했다. 줄을 서는 과정에서 일어난 단순한 실랑이가 오전 7시쯤에 커다란 싸움으로 번졌다. 돌을 던지고, 파이프가 동원됐다. 아테네에 지원병력이 요청됐다.
다음날부터는 난민들의 항구 입장이 제한됐다. 등록절차는 더 길어졌다. 이로 인해 우리 그룹도 레스보스섬에서 일주일이나 머물게 됐다. 하루는 이라크에서 온 무스타파가 꼭 증명서를 받아오겠다고 새벽 2시도 되기 전에 나섰다. 오후 1시에 돌아온 그는 또 싸움이 벌어지면서 사무소는 문을 닫고 빈손으로 왔다고 말했다.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인내심을 잃어갔다.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는 동안 나는 우리가 도착했던 해안가로 갔다. 차를 타고 한시간 남짓 해안가로 돌아가는 길에도 끊임없이 난민들의 행렬이 지속됐다. 며칠 전 우리가 도착한 해안가 등대에 도달하니 이미 몇명의 현지인들이 쌍안경을 들고 반대편에서 오는 배들이 있는지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두 부류이다. 난민들이 도착하는 순간 그들이 타고 온 배의 모터를 챙기려는 사람들이거나, 그 난민들을 트럭에 가득 실어 인근 마을에 데려다주고 돈을 챙기려는 자들이다.
해안가에는 버려진 수많은 구명조끼와 구멍난 고무보트의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배를 운전했던 이들이 도착한 뒤에는 브로커들의 요청에 따라 구멍을 내서 못 쓰게 만든 보트들이다. 심지어는 코란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었다. 11대의 보트가 다른 마을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보트들이 비밀 상륙작전을 하듯 약 8㎞ 떨어진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재빠르게 차를 몰아 그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몇몇 저널리스트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배가 도착할 예상 지점으로 차를 타고 나가고 있었다.
내가 이미 겪어본 도착 직후의 모습들이 재현됐다. 몇몇 젊은이들은 기쁨에 겨워 배에서 뛰어내려 소리를 질렀다. 자원봉사자들은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내리는 것을 돕고 마른 옷들과 수건을 건네줘 저체온증이 오지 않도록 조처를 했다. 난민들의 첫 일은 비닐랩에 꽁꽁 싸뒀던 전화기를 꺼내들어 친지들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 역시 눈물이 글썽였다.
미틸리니로 돌아오니 항구의 상황은 최악으로 가고 있었다. 하루에 1천여명씩 도착하는데 하루에 불과 몇백명씩 처리하고선, 걸핏하면 등록사무소를 닫기를 며칠째 반복했다. 늘어가는 거리의 쓰레기에 주민들의 불만도 거세졌다. 다급한 난민들은 몇백 유로의 뒷돈을 주고서라도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는 시도가 늘어났다.
■ 아테네에서 국경까지, 8~10일
그리스 레스보스섬에서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들을 위주로 세워진 수용소에 임시로 만들어진 모스크에서 하자라족 출신 난민들이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있다.
섬을 빨리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어 보이던 8일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항구를 향해 달려갔다. 지방정부가 섬에 체류하는 난민들을 내보내기 위해 여권을 소지한 시리아인에 한해서는 등록증명서를 바로 내주고, 아테네로 보내는 페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사실로 확인됐다. 항구에서만 진행하던 등록절차를 몇군데로 나눠 신속히 처리해줬다. 이제는 증명서를 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페리 티켓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우리 일행은 용케 그날 오후에 출발하는 페리를 구했다. 드디어 섬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감격스러워하며 시간에 맞춰 항구로 나갔다. 배에 올라타려는 순간 나는 그들과 같은 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승선을 거부당했다. 나는 재빠르게 아테네로 가는 다른 배편이나 항공편을 알아봤다. 이미 매진이 됐다. 그 친구들과 합류할 수 있는 루트는 북부 도시 테살로니키로 간 뒤 다시 아테네로 가는 것이었다. 비행기로 테살로니키로 간 뒤 기차로 6시간 이동해 아테네로 가는 여정이었다. 몇시간 뒤, 나는 이미 그 길을 가고 있었다.
다음날인 9일 새벽 5시에 아테네에 도착한 나는 기차역 밖 공원에서 노숙하던 우리 일행과 조우했다. 우리는 아침 7시 기차에 올라탔다. 내가 거쳐서 왔던 테살로니키로 가는 기차였다. 본격적으로 육로를 통한 우리의 여정이 시작됐다. 이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빠른 리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테네에서부터 기차에 같이 타고 왔던 난민들은 대략 100명 정도였다. 테살로니키 역에 도착해서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갑자기 옆에서 누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내가 기차 안에서 이미 가족으로부터 허가를 받고 찍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다른 시리아인의 항의인 줄 알았다. 카메라를 부수기로 작정한 듯 계속해서 화를 내며 소리를 질러댔다. 주위의 시리아인 가족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난민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는 막 도착한 난민들에게 국경을 넘어가는 차량을 주선하는 터키 브로커라고 바젤이 말해줬다.
이때 난민들이 그의 접근을 막았다. 그의 제안과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들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듯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터키에서 브로커들로부터 인간이 아닌 상품 취급을 당하고 레스보스에서의 기나긴 기다림에 지친 난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했다. 점점 그들의 여정을 나의 여정으로 동일시하게 됨을 느꼈다.
버스로 마케도니아와의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우리는 걸어서 국경을 넘어 마케도니아로 들어갔다. 수많은 택시와 버스들이 도착하는 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의논 끝에 한 사람당 60유로를 내고 택시로 세르비아와의 국경까지 바로 가기로 결정했다.
■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까지, 10~11일
시리아 난민이 세르비아 국경 근처 철길을 걷고 있다.
조금은 한산했던 그리스-마케도니아 쪽 국경지대와는 달랐다. 두시간 걸려 세르비아 국경지대로 들어가자, 끊이지 않는 버스와 택시들의 행렬로부터 수천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주위는 어둑하고 비가 내렸다. 우리는 약 3㎞의 기찻길을 걸었다. 걸어가는 내내 내 옆에 있던 시리아 북부에서 온 한 쿠르드족 청년이 자신의 민속 노래를 목이 쉬어가면서까지 끊임없이 불러댔다. 검문소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나는 앞서서 가고 있던 일행과 헤어졌다. 수많은 인파 속에 결국엔 나 혼자서 세르비아로 걸어 넘어왔다.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멀찌감치 보이는 불빛만을 지표 삼아 약 6㎞를 걸은 뒤 세르비아의 첫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또다시 수많은 난민이 그곳으로부터 10㎞ 떨어진 난민 등록소에 가려고 기나긴 줄을 섰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터무니없이 비싸게 가격을 부르는 택시 기사들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구멍가게에서 핸드폰에 사용할 세르비아 유심 카드를 구입했다. 어디서 일행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순간 벌써 어떻게 택시를 잡았는지 내 일행이 나를 발견했다. 택시 안에서 소리를 질러대며 얼른 타라고 불렀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했다.
세르비아 난민 등록소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또다시 한번 숨이 턱 막힘을 느꼈다. 레스보스와 마찬가지로 등록소에서 서류를 받지 않는 한 법적으로 세르비아 안에서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한밤중에 등록소 밖에 늘어선 줄은 레스보스의 끝이 보이지 않던 그 줄과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밤새 기다려서 서류를 받거나, 불법 위장서류를 비싼 가격에 가서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로 가는 선택이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쉬지 않고 이동하며 지친 일행은 조금이라도 빠르게 헝가리에 도달할 수 있는 불법 위장서류를 선택했다. 베오그라드에서 우리는 하루 휴식을 취했다. 그다음 날 우리는 헝가리 국경 쪽으로 이동했다.
닫혀버린 마지막 국경…새벽 숲길을 지나 ‘마침내 독일’아테네서 마케도니아로 다시 세르비아로… ‘최대 고비’라던 헝가리 국경은 기적처럼 열려 있었다 여기에서 멈출 것이냐 독일로 향할 것이냐, 또 갈림길
독일 국경은 임시폐쇄 결국 동행한 난민들은 밀입국을, 난 홀로 독일행 기차를 탔다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2주간의 여정을 끝낸 뒤 작별 난민신청 절차가 끝나는 대로 재회할 것을 약속하며
지난 10일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로 건너가는 난민들. 이들은 기찻길을 따라 3㎞정도 걸어간 뒤 검문소에서 짐을 검색당하고 또다시 15㎞를 걸어갔다.
■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12~13일
그리스에 있을 때부터 모든 이들이 헝가리 국경 전체에 세워진 철책에 대해 얘기했다. 터키에서 배를 탄 이후로 난민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난제였다. 모든 이들이 긴장한 채 국경지대에 도달했다. 근방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또다시 수천명이 기찻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기를 약 30분가량, 우리는 멀리서 보이는 밝은 불빛을 보고, 국경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됐다.
또다시 운이 좋았다. 우리가 국경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헝가리 정부는 일시적으로 난민 통과를 허용했다. 우리 일행을 포함한 난민들은 예상치 못하게 헝가리로 쉽게 입국했다. 쉬운 입국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끊임없이 세르비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헝가리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에 모든 이들은 또 다른 갈림길에 마주서게 됐다. 그대로 기찻길을 따라 걸으면 헝가리가 세운 캠프로 이동하게 된다. 모든 이들은 여기서 여정을 끝내고 지문을 찍음으로써 헝가리를 새로운 출발의 기점으로 삼게 된다. 아니면, 몰래 행렬에서 벗어나 옥수수밭과 어두운 숲길을 따라 많은 이들이 거쳐간 주유소에서 또다시 불법으로 차량을 이용해 부다페스트로 가는 길이 있다.
내가 헝가리 국경을 건너는 순간 어깨에 짊어진 카메라는 국경수비대에 나의 저널리스트 신분을 알게 해줬다. 국경수비대는 내가 국경을 건너는 것을 막아섰다. 나는 부득이하게 일행과 두번째로 헤어졌다. 이 주유소에서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비용은 한 사람당 200유로였다. 대부분 자그마한 차에 난민들을 실어날랐다. 이렇게 우리는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우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오스트리아로 가는 난민 수송 열차에 몸을 실었다. 안도와 긴장 속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편안한 시간은 곧 끝이 났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과의 국경으로 향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비보를 들었다. 독일이 국경을 임시로 폐쇄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까지 먼 길을 온 이들에게 그 소식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조처가 일시적인 것이기를 바라면서 난민들은 기차역으로 가지만 난민들이 더는 표를 구입하지 못하도록 이미 막아놓은 뒤였다.
먼 여정을 시작한 이후 사기가 가장 떨어진 순간이었다. 몇시간을 빈 기차역 주위에서 서성거린 이후에 바젤이 해결책을 찾아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박사 과정에 입학해 생활한 지 십여년이 된 어린 시절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그 친구가 바젤을 돕기 위해 8시간가량을 운전해서 오고 있다는 낭보였다. 그 친구가 독일 국경까지 데려다주고 우리 일행은 걸어서 독일로 밀입국을 하는 계획이었다. 밀입국 뒤에는 다시 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까지 가기로 했다. 위험 부담이 컸지만, 가장 현실적이자 하나뿐인 선택이었다.
■ 독일 프랑크푸르트, 14일
이튿날인 14일 새벽 5시, 독일로부터 밤새 운전해 빈으로 온 바젤의 친구는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움직이기를 재촉했다. 문제는 차가 크지 않아서 6명이 탈 공간이 없었다. 당연히 내가 제외됐다. 나에게 대강의 루트를 알려준 뒤 일행은 황급히 떠났다.
나는 기차역으로 가서 독일로 들어가는 표를 구입했다. 그날 오전부터 무스타파로부터 문자를 받은 오후 4시께까지의 기다림이 내가 지난 2주 동안 겪었던 시간 중에 가장 피를 말리는 듯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일행은 국경 지역의 숲으로 들어가 몇시간을 걸은 뒤에 독일에 도착했다. 우리의 여정이 곧 끝나감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몇시간 뒤 밤 11시께 나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난 2주간을 함께한 친구들과 다시 만났다. 바젤과 루나와는 바로 이별의 포옹을 나눠야 했다. 우리는 난민 신청 절차가 끝나는 대로 다시 재회할 것을 약속했다. 바젤과 루나는 떠나갔다. 인샬라.
네덜란드에서 난민 신청을 할 계획이었던 무스타파와 나는 마인츠 기차역에서 이번 여정의 마지막이 될 노숙지를 구했다. 구석에 자리를 마련했다. 앞선 두 주일과는 달리 내일이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편히 잠자리에 누웠다.
글·사진 전해리 다큐멘터리 사진가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장했고 2009년 워싱턴 코코런 미대를 졸업했다. 아이티, 파키스탄, 시리아 등 제3세계의 다양한 이슈들을 취재해왔다.
시리아 난민이 철망에 기대어 있다.
▶ 현재도 시리아 난민과 함께하고 있는 전해리 작가의 취재를 ‘뉴스펀딩’을 통해 도울 수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의 탈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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