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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런던/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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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득표로 당 대표에 뽑혀
‘낡은 좌파’ 노동당 격변 예고 중도우파 포괄 ‘제3의 길’ 아닌
긴축반대·인권·비핵화 등
정책분야마다 급진적 비전 제시 다음 총선까지 5년이나 남아
당 안팎의 도전 극복하며
지도력·수권능력 보여줄지 주목 ■ 안개 속에서 출범한 사회주의 정당 런던 새벽길의 안개를 뚫고 창당대회에 모여든 사내들은 페이비언협회,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연맹 등 3개의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 대표들이었다. 노동운동의 주요 분파들이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대의 아래 사상 처음으로 함께한 자리였다. 영국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노동대표위원회는 그렇게 출범했다. 영국에선 1918년이 되어서야 여성(30살 이상)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 사회주의 운동에 몸을 던져온 이들이 부르주아 정당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로 결정할 때만 해도 집권은커녕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존속 가능성마저 불확실했다. 온건 좌파에서 급진주의자까지 당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도 너무 넓었다. 오직 선명한 것은 ‘노동자 권력 쟁취’라는 기치와 당가로 애창된 ‘적기가’의 결연한 노랫말뿐이었다. 모든 게 흐릿한 속에서 19세기가 막을 내리고 20세기가 열리고 있었다. 노동대표위원회는 출범 8개월 만인 1900년 10월 총선에 15명의 후보를 내보냈다. 첫 도전이자 중대한 시험이었다. 시작은 초라했다. 노동대표위원회가 얻은 의석은 하원 670석 중 단 2석(득표율 1.8%)뿐이었다. 창당 6년 만인 1906년, 노동대표위원회는 당명을 노동당으로 개칭했다. 그해 총선에선 29석으로 의석수를 늘렸다. 득표율(4.8%)로는 자유당과 보수당에 이어 3위였다. 당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 총선에선 연립보수당에 이어 득표율 2위(20.8%)에 오르며 57석을 차지했다. 그해 전당대회에서 노동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분명히 한 당헌을 채택했다. 특히 제4조의 ‘생산수단의 공공소유’ 조항은 유명하다. “육체노동자나 정신노동자가 근로의 결실과 가장 공정한 분배를 보장받기 위해,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동소유라는 바탕 위에서 모든 산업과 서비스의 관리와 통제를 확보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한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전체 615석 중 287석(득표율 37.1%)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집권당이 됐다. 이전까지 영국 정치의 ‘보수-자유’ 양당 구도는 ‘보수-노동’ 양당 구도로 재편됐다. ■ 충격과 환호, 또는 충격과 공포 2015년 9월12일 토요일, 런던은 초가을의 쾌적한 날씨였다. 이날 영국 현대 정치사에 이정표를 세울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 전 마감된 노동당 대표 선거의 투표를 집계한 결과, 주류 정치권에서 한참 벗어나 있던 ‘아웃사이더’인 제러미 코빈 의원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코빈의 득표율은 59.5%로, 2위 후보(19%)보다 세 배나 많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코빈은 화려한 학벌, 폼나는 경력, 빛나는 젊음도 없는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런던 태생인 그는 폴리텍을 중퇴하고 재단사노조연맹과 전국공무원노조 등 노조단체에서 일하다 1974년 런던 구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약관 스물다섯이었다. 이어 1983년 총선 때 34살의 젊은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해 중앙정치에 진출한 이래 지금까지 32년째 현역의원을 유지해왔다. 이처럼 오랜 경력의 정치인이 당 내부에선 철저한 비주류이자 소수 반대의견의 대표자였다. 코빈의 당 대표 당선은 지난 6월 후보 등록 때부터 극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입후보에 필요한 최소 35명의 추천 의원조차 확보하지 못하다가 마감 직전에야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당내 토론과 정책 연설이 거듭될수록 그의 저력과 진정성이 힘을 발휘했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고 겸손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가치에는 단호함과 일관성을 보였다. 영국인들은 매료됐다. 코빈의 이름을 따 코비나이트(Corbynite)라고 불리는 팬그룹도 생겨났다. 런던의 한 정신과 의사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7월말 일간 <인디펜던트>에 코빈 지지를 선언하는 커밍아웃 기고를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코빈 지지자들은 어리고, 미숙하며, 순진하다고 말한다. 나는 코빈이 노동당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중년의 고소득 전문직업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코빈 지지자다”라고 썼다. 그는 “많은 노동당 지지자들이 논쟁을 최소화하는 ‘안락한 지역’에 머물러왔지만 솔직한 반론과 그것을 뒷받침할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유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의 상징”이라며 “노동당이 우파 보수당에 대응해 갈수록 우경화한다면 더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당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당 대표 선거 전 20만명 수준이던 당원이 불과 석달 새 32만명을 넘어섰다. 코빈 신드롬에 가까웠다. ‘늙은 유럽’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영국만큼이나, ‘낡은 좌파’라는 딱지가 붙은 노동당의 극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지지자들에게 코빈의 당선은 ‘충격과 환호’였다. 영국의 대표적 진보언론 <가디언>도 선거 초기만 해도 코빈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점차 적극적인 옹호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주류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사회주의 기치를 선명히 내건 코빈의 등장은 좌우를 막론하고 ‘충격과 공포’였다. 코빈은 지난달 당 대표 당선 뒤 처음 참석한 의회 공식행사에서 영국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가 울려 퍼졌을 때 침묵했다. 지난 8일에는 여왕의 자문그룹인 추밀원 위원 임명식에도 불참했다.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공화주의자의 신념에서였다. 논란이 거세지자 노동당 대변인은 향후 코빈 대표가 국가를 부르고 추밀원 회의엔 참석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앞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 7일 보수당 콘퍼런스에서 “코빈은 안보를 위협하고, 테러리스트에 공감하며, 영국을 증오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졌다”며 ‘막말’을 쏟아냈다. 같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조차 “코빈이 대표가 되면 노동당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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