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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 개인정보 침해, 200조원 소송과 침묵 |
e세상/김재섭 기자의 어바인통신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자바원’ 행사에 다녀오면서 비행기를 이용했다. 보안검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갑자기 2001년 출장 때 시카고공항에서 겪었던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 앞에 서 있던 미국인 10여명은 그냥 통과시키고 나만 찍어 명령투로 겉옷과 신발을 벗으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허리띠까지 풀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도 같은 요구를 받으면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앞에 선 사람들이 순서대로 겉옷과 신발을 벗고 허리띠까지 풀어 플라스틱 통에 담아 레이저 검색기로 밀어넣은 뒤 바지춤을 잡고 검색대를 통과했다. 누가 요구하지도 않고, 안내판도 없는데 모두 그렇게 했다. 전에는 허리띠까지 풀라는 요구에 항의하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미국인들이 알아서 허리띠까지 풀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운전사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비행기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라며 “동의하지 않는다면 가만있지 않죠”라고 말했다.
집에 도착해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후보들의 유권자 개인정보 침해가 심각한 수준이란 기사가 눈에 띄었다. 유권자 개인정보를 부당하게 수집해 선거운동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앞선 정보화 덕(?)에 개인정보 및 사생활 침해를 당하는 수준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수사기관이 출입기자들의 통화내역을 들춰보고, 기업들이 고객의 개인정보를 본인 동의를 제대로 받지 않고 마케팅에 활용하거나 남에게 팔아넘기는 등 최근 드러난 사례만 꼽기에도 손이 모자랄 정도다.
처음에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네티즌과 손잡고 인터넷 사이트 회원으로 가입할 때 왜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느냐고 따지고, 고객의 개인정보를 부당하게 이용한 기업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 개인정보 침해 행위에 맞서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자체장 선거 후보들의 유권자 개인정보 침해 기사 역시 최소한의 문제의식조차 배어있지 않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시덥잖다.
미국인들이 허리띠까지 풀라는 요구를 보안검색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기꺼이 응하는 것은 필요성에 동의해서라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나라 정부기관이 국민의, 기업이 고객의, 선거 출마자가 유권자의 정보인권을 침해해도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명분에 동의해서라고 봐야 하나?
미국의 통신 이용자들이 통화내역을 국가안보국에 제공한 것으로 드러난 통신업체들을 대상으로 2천억달러(200조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사생활 침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 소비자, 네티즌, 유권자들도 정보인권 침해 명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들처럼 직접 행동에 나서야 맞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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