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28 18:36
수정 : 2007.05.29 01:43
산유국 툭하면 감산 짬짜미
석유메이저, 정유시설 투자 게으름
“멋대로 유가를 정하는 오펙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
“원유값 인상보다 휘발유 값을 더 올려받는 석유회사들이 문제다.”
지난 22~23일 미국 하원은 지난주 사상최고치(명목가격 기준)인 1갤런(약 3.8ℓ)당 3.22달러(약 2990원)까지 오른 휘발유 값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강경조처를 담은 법안 2개를 통과시켰다. 하나는 오펙의 가격담합 시도를 법무부가 미 법원에 제소할 수 있도록 했다. 다른 법안은 비상시 석유업체들의 “터무니 없는” 연료값 인상을 처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백악관이 “인위적 가격통제의 부작용”을 들어 두 법안 모두를 거부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고유가 책임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수입국은 산유국을, 산유국은 서구 석유메이저를, 석유메이저는 산유국과 석유정책을 지목하며 책임 떠넘기기에 한창이다.
오펙 담합론=12개 산유국이 가입한 오펙(석유수출국기구)은 유가 급등 때마다 맨 먼저 회초리를 맞는다. ‘석유 생산·수출 카르텔 금지법’ 마련을 주도한 존 코이너스 미 하원 법사위원장은 “산유국의 탐욕을 채우려는 담합 모의가 석유가격을 부당하게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오펙은 지난해 하루 110만배럴 감산을 결의해 빌미를 제공했다. 원유가격이 올 여름 배럴당 80달러를 돌파할지 모른다는 전망은 오펙이 과거와 달리 유가 안정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에서 비롯한다. 지난해 여름 브렌트유는 배럴당 78.65달러, 서부텍사스중질유는 78.40달러로 최고점을 찍은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이달 초 “석유 공급은 원활하고, 비축분도 충분하다”며 증산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24일에도 오펙 핵심관계자가 이를 재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컨설팅업체인 피에프시에너지는 “1960년대와 70년대 산유국들의 유전 국유화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산유국들의 증산 기피와 설비 노후화를 우려했다.
석유메이저 폭리론=오펙 쪽은 원유 공급을 늘려도 이를 정제해 파는 석유메이저들은 소비자가격을 내리지 않을 것이고, 이들이 정유시설 투자를 게을리하는 게 근본적 문제라고 반박한다. 소비자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결국 정유시설을 보유한 석유메이저들이라는 시각도 강하다. 미 연방무역위원회의 윌리엄 코바치크는 최근 하원에 나와 “원유 가격은 휘발유값 인상 폭에 상대적으로 적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 석달간 서부텍사스중질유가 갤런당 15센트 이상 오르지 않은 반면, 휘발유는 80~90센트 뛰었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도 고유가를 유지하려고 투자를 미룬다는 의구심이 생긴다며, 석유메이저 책임론에 가세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멕시코만 정유시설들을 난타한 2005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정유시설 증설에 군기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업체들은 비용을 이유로 거절했다.
세계 산유량의 4분의 1을 소비하는 미국은 하루에 2100만배럴의 원유를 정제해 쓰는데, 이 중 1750만배럴만 국내에서 정제한다. 지난 31년간 미국에는 새 정유시설이 들어서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구조조정을 거치며 301개이던 정유시설은 문을 닫거나 통폐합돼 149개로 줄었다. 세계 석유 수요는 매년 2% 가량 늘지만, 세계 정유 능력은 2000~2005년 불과 1.5% 증가했다. 지난해 1시간마다 450만달러(약 41억7천만원)씩 순이익을 올린 엑손모빌의 기록행진 이면에는 이런 구조가 있다.
그러나 석유메이저들은 오히려 미국 정부가 연안 탐사를 제한하고 대체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려 투자 의지를 꺾는다는 반론을 내놓는다. 셸의 존 호프마이스터 사장은 “바이오연료 산업을 적극 후원하는 정책은 석유 생산과 정제 능력을 높이려는 투자를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자들은 석유시장 특유의 수요-공급 관계가 공급자들의 배짱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석유가격이 10% 오를 때, 수요는 10%가 아니라 단지 1%만 감소한다. 이런 점에서 석유시장은 목숨을 다루는 의료시장에 이어 소비자한테 가장 불리한 시장이다. 석유시장을 더는 ‘자유경쟁’ 체제로 놔두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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