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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한 주택 앞에 지난달 29일 매물로 나왔다는 설명과 함께 압류 처분에 들어갔다는 내용의 표지가 붙어 있다. 덴버/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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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지금 ‘금리 인하’ 논쟁중
“응징하자” 동결론
무분별 대출이 부실 주범…거품 빼야
“구제하자” 인하론
‘썩은 살’ 도려내려다 경기까지 죽일라 썩은 살을 도려야 하나, 급한 불부터 꺼야 하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 해법으로 연방준비제도(FRS·연준)가 기준금리를 내리는 게 유력해졌지만, 금리 인하를 둘러싼 논란이 잠들지 않고 있다.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의 상대적 중요도와 연관성에 대한 인식차, 거품 대처를 둘러싼 강·온 양론 대립이라는 고전적 논쟁이 재발해 양보 없는 논리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 ‘썩은 살 도려내자’-금리인하 반대론=지난달 17일 연준이 ‘시장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으며 5.25%의 기준금리를 고수하기로 할 때까지 표면적으로는 ‘응징파’가 기선을 잡고 있었다. 모기지업계가 상환 능력이 미심쩍은 이들한테 마구 대출을 해주고, 금융권은 모기지 채권을 닥치는 대로 파생상품으로 만들어 팔면서 부실을 키운 게 사태의 본질이기 때문에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은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2001년 9·11 테러 뒤 기준금리를 1%까지 내린 게 미국 경제에 거품을 끼게 했다는 진단도 내놨다. 이런 시각의 대표주자는 다름아닌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었다. 버냉키 의장은 2005년 지명 당시 “그린스펀 시대의 정책과 전략을 계승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금리 인하 요구에 꿋꿋이 버텼다. 버냉키 의장이 ‘지조’를 지키는 데는 금리를 내리면 당장은 증시와 채권시장이 살아나고 얼어붙은 신용시장이 풀릴 수 있겠지만, 중앙은행이 무분별한 투자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이런 자세는 물가상승 억제에 주력하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행보와도 맞아떨어진다. 유럽과 일본 중앙은행들도 기준금리를 묶거나 심지어 올릴 수도 있다고 밝혀, 국제적 인플레이션 대처 ‘전선’이 굳건해 보였다. 일부에서는 학자로서 1920~30년대 대공황기의 금융의 역할을 연구했던 버냉키 의장의 학문적 기반도 작용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투자자들의 단기적 이해에 매달리기보다 장기적 균형을 위해 인플레이션 억제라는 중앙은행의 주요 책무에 충실하려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 ‘생살까지 다칠라’-금리인하론=그러나 자산시장 침체와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구제파’의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특히 지난달 말 각국 중앙은행 총재와 학자들이 참석한 ‘잭슨홀 포럼’은 분위기가 이들한테로 크게 기우는 계기가 됐다. 민간기구인 전미경제조사국 회장인 마틴 펠트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 경제가 아주 심각한 하강 국면으로 들어설 수 있다”며 기준금리를 대체적 인하 요구 수준인 0.25% 포인트가 아니라 1% 포인트 깎으라고 촉구했다. 주식과 채권 가격 끌어올리기에 사활을 건 모기지업계·헤지펀드·사모펀드·투자은행 등이 구축한 ‘구제파’ 진영에 학계까지 가세한 모양새가 연출됐다.
이에 버냉키 의장은 포럼 연설에서 집값 하락이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으면 “행동에 나서겠다”고 화답했다. 대놓고 ‘구제파’로 돌아서진 않았지만, 실물경제 타격을 이유로 월가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는 태도를 분명히 한 셈이다. 거품을 없애려다 경기침체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진단이 버냉키 의장을 움직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지난달 달러를 풀고, 연준의 시중은행 대출 이자율인 재할인율을 0.5% 포인트 내리면서도 기준금리만은 양보하지 않으려 했지만 갈수록 중간지대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펠트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도덕적 해이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경제가 죽는다는데 어쩌겠냐’는 논리를 폈다. 버냉키 의장과 조지 부시 대통령은 “투기세력 구제가 정부의 역할은 아니다”며, 도덕적 해이에는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200만에 이른다는 압류 예상 가구나 모기지 관련 채권들 중 어떤 게 투기꾼 수중에 있는지 골라내기 힘들뿐더러, 이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펴기도 어렵다는 게 문제다. 실물경제와 성장률을 볼모로 삼은 투기세력이 이번에도 이길 수밖에 없는 구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4일치 사설에서 “집값이 계속 떨어지고, 금융시장 혼란이 경제성장을 떨어뜨린다면 연준은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단순히 시장을 만족시키려고 기준금리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대마불사’의 신화를 재확인한 투자자들이 미국 경제를 더 멍들게 할 것이라며 금리 인하 반대론자들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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