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25 21:22
수정 : 2007.12.2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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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중동 자본의 월가 투자은행 지분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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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1~3위 투자은행, 자존심 접고 서브프라임 ‘불끄기’
지분 10% 안팎 넘겨…메릴린치 신주 할인발행 ‘굴욕’
미국 경제의 심장인 뉴욕 월가가 아시아와 중동의 국부펀드에 손을 벌리는 굴욕을 맛보고 있다. 10년 전, 국제통화기금(IMF)과 월가의 은행들이 달러 지원을 내세워 외환위기를 겪는 아시아 국가들을 압박한 일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미국의 3번째 규모 투자은행인 메릴린치는 싱가포르 정부 투자기관인 테마섹으로부터 50억달러(약 4조7천억여원)를 투자받고 지분율 9.9%의 신주를 넘기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메릴린치는 미국의 다른 투자자로부터도 13억달러를 들여오고, 계열사인 메릴린치캐피탈은 지이캐피탈에 매각한다.
아시아와 중동 국가 외환보유고의 월가 지분 인수는 이미 큰 흐름이 됐다. 이달 들어 미국 2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중국의 외환보유고 운용사인 중국투자공사로부터 전환사채 형식으로 50억달러를 투자받고 지분 9.9%를 내주기로 했다. 스위스계 투자은행 유비에스(UBS)는 싱가포르투자청과 중동 투자기관에서 115억달러(지분율 11~12%),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시티그룹은 아랍에미리트연합 정부 투자기관인 아부다비투자청에서 75억달러(지분율 4.9%)를 수혈받기로 했다.
아시아·중동의 외환보유고가 월가에 물밀듯 들어오는 이유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의 충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정부 돈을 받아들이게 된 메릴린치의 경우 서브프라임 관련 투자로 3분기에 보유자산 가치를 79억달러 상각했고, 4분기에도 80억~100억달러의 추가손실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을 듣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연거푸 기준금리를 내리고 재무부도 은행권 구조조정펀드 조성을 유도해 피해 차단에 나섰지만, 불어나는 손실 앞에 역부족이다. 급기야 자본금 수혈에 애가 탄 투자은행들은 금기시하던 외국 국부펀드에게까지 손을 벌리게 된 것이다.
뉴욕증권거래소 최고경영자를 하다 메릴린치에 구원투수로 기용된 존 테인 최고경영자는 “최우선 목표는 대차대조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며, 이번 합의가 실사구시적인 동기로 이뤄졌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동과 중국 회사들의 미국 업체 인수를 안보적 이유 등으로 잇따라 좌절시킨 미국의 과거 분위기에 비추면, 최근 거래들은 생존을 위해 명분과 자존심을 접은 것이나 다름없다. 메릴린치는 테마섹에 현재 시장가격보다 주당 10달러 가량 싸게 신주를 발행키로 해 다급한 사정을 보여줬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시장주의의 가장 강력한 옹호세력으로 외국 정부 자본에 퇴짜를 놓던 월가가 국부펀드로부터 구제를 받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더 많은 국부펀드들이 미국 금융기관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반발도 일고 있다. 보수적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의 케빈 헤셋은 국부펀드들은 수익만이 아니라 “전략적 이해”에 따라 투자하기 때문에 이들한테는 의결권을 주지 말자고 주장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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