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1.06 19:10
수정 : 2008.11.06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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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가자시티에서 기념품가게 주인이 5일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사진이 박힌 머그잔을 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고 있다. 가자/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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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발 금융위기는 미국의 ‘헤게모니 위기’를 다시 확인시켰다.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1960년대 말부터 거론되던 국제사회의 오랜 주제다. 이번 위기는 1970년대 달러쇼크에 비견된다. 당시는 미국에 부하가 너무 커지며 헤게모니의 위기가 초래됐으나, 이번 위기는 미국 내부에서 자초됐다는 점이 차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미국 헤게모니 위기의 심연은 훨씬 깊고 근본적이란 지적이 높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잉여생산력에 바탕을 둔 달러와 군사력으로 동맹국들에 ‘관대한 지원’을 하며 자본주의 질서를 떠받쳐 왔다. 그러나 미국은 천문학적 베트남전 전비와 유럽과 일본의 경제력 부상에 따른 무역적자에 직면하자, 결국 1971년 달러와 금의 교환을 포기하는 ‘달러 쇼크’를 발표한다. 1차 헤게모니 위기다. 전후 자본주의 국제 경제질서를 떠받치던 브레턴우즈 체제는 파탄났다. 중국과 소련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데탕트 노선으로의 전환도 불가피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정권은 군비확산 노선을 추구하며, 추락한 헤게모니를 억지로 곧추세웠다. 늘어나는 쌍둥이 적자 속에서, 일본한테 미국 내 제조업과 부동산이 인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일본의 거품 경제가 파탄나고 소련이 무너지면서 미국은 슈퍼파워로 복귀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응징하는 걸프전은 미국 헤게모니의 부활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앞세운 미국의 일방주의는 패권의 붕괴를 자초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정점에 이른 신자유주의와 일방주의의 폭주는 금융위기와 외교노선의 파탄으로 귀결됐다. 이번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는 이전과는 달리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 안에서도 이제 헤게모니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새로운 외교안보 노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말 초당적 인사들로 구성된 ‘스마트파워 위원회’는 대테러전쟁이라는 강압적 힘에만 의존하는 세계전략의 한계를 지적하고, 군사력·경제력 등 ‘하드 파워’와 더불어 문화와 아이디어를 활용한 ‘소프트 파워’를 촉구한 바 있다.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이끄는 미국에 다자주의 노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루지야 전쟁, 동유럽 미사일방어체제(MD) 설치 논란 등에서 이미 미국은 무력함을 드러냈다. 결국 단극·양극체제를 지나, 다극화·무극화의 국제질서는 미국의 외교정책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3일 미국 새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강조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역사의 시계추는 다자주의로 돌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당선자도 핵무기 군축은 물론 이란·북한·쿠바 등 이른바 ‘악의 축’ ‘불량국가’의 지도자와도 만나겠다며, 대화와 협력을 강조해 왔다. <포린 폴리시>는 5일 “미국 혼자서 국제사회의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이라크에서 확실히 배웠다”며 “금융위기, 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등의 국제문제는 전략적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5일 “미국 새 행정부의 최대 과제는 상호의존적인 세계를 다스릴 더 나은 수단을 찾는 것”이라고 짚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오바마의 최대 변화는 대외정책에서 다자주의로의 선회겠지만, 선별적·선택적 다자주의로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바마는 4일 당선 연설에서 “이 세상을 찢어놓으려는 이들은 물리칠 것이며, 평화와 안정을 찾는 이들은 지원할 것”이라면서도 “진정한 우리나라의 국력은 군사력과 부의 규모가 아니라, 영구적인 이상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선별적 다자주의로 가겠다고 밝힌 것이다. <가디언>은 5일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밝은 얼굴의 헤게모니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오바마의 다자주의가 어떤 얼굴을 하느냐에 따라, 다시 세계는 웃고 울 것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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