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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6 19:28 수정 : 2006.03.0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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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 또다른 혁명 ①

미국과 유럽, 일본의 전후세대를 가리키는 이른바 ‘베이비부머’(1946~1964년생)가 올해 처음으로 환갑을 맞는다. ‘인구학적 혁명’으로 불리는 베이비부머의 등장은 인류의 삶 전반을 뒤흔들었다. 인종차별 철폐와 여권 신장, 반전 운동과 로큰롤, 텔레비전과 자동차, 자유연애와 이혼……. 베이비부머들의 연대기는 20세기 라이프 스타일의 변천사와 겹친다.

베이비부머의 은퇴는 또다른 혁명을 예고한다. 이미 이들이 축적한 거대한 부와 여유를 노린 신종 산업이 분출하고 있다. 정당과 시민단체들도 이들의 복잡한 코드를 읽느라 분주하다. 한편에선, 이들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뒷세대들의 고민이 깊어간다. 이들은 또다시 사람들의 삶을 바꿀 것인가? 베이비부머가 남긴 놀라운 유산과 새로운 숙제를 따라가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새해 첫날, 자정을 1초 넘긴 시각에 필라델피아의 세인트아그네스 병원에서 예쁜 여자아기가 태어났다. 그 다음날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올해 첫 태어난 아기’ 캐슬린 케이시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땐 그 누구도 이 아기의 탄생이 가진 사회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케이시의 울음은 인구통계학적으로 가장 놀라운 사건으로 꼽히는 베이비붐(baby boom)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포효'였다.

7800여만명…2006년부터 60대로

이제 한 시대가 지나갔다. 올해 케이시를 비롯한 첫 베이비부머(baby boomer)들은 60살이 됐다. 조지 부시와 빌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스티븐 스필버그가 케이시와 동갑내기들이다. 케이시는 “우리가 60살이 된 건 사회적으로 하나의 이정표”라고 말했다.

지난 60년 간 세계는 바뀌었다. 베이비부머들은 세계를, 사회를 바꿨다. 베이비부머 세대를 다룬 책 <더 위대한 세대>(The Greater Generation)의 저자 레너드 스타인혼 교수(아메리칸대학)는 “부머 세대 이전에 여성들은 집에 있어야만 했다. 흑인들은 백인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동성애자들은 벽장 속에 숨어있어야 했다. 베이비부머들이 기준을 바꿨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고, 더 관용적인 사회에 살게 됐다”고 말했다.

1961년 영어사전 웹스터에 ‘라이프스타일’(생활양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도 부머 세대를 표현하려는 노력이었다. 인종차별 철폐와 남녀평등, 반전운동, 반항과 열정, 로큰롤, 프리섹스 그리고 이혼…. 미국 베이비부머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스타인혼 교수는 “그건 마치 들불처럼 퍼져나가며 전 세계의 문화와 사회를 바꿨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본다. 이것은 마치 미국이 1776년 독립선언을 통해 전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과 흡사했다”고 말했다.

베이비부머들이 그 이전이나 또는 이후 세대에 비해 훨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데엔 엄청난 숫자가 한몫을 했다. 미국에서 1946~1964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는 7800여만명이었다. 부머의 부모 세대가 3천만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두배를 뛰어넘는다. 베이비부머 이후의 이른바 ‘X세대’(1965~1977년)는 4500만명이 채 안됐다.

성평등·반전·로큰롤 등 큰 파장

숫자는 곧 시장이었다. 베이비부머와 함께 시장규모가 커지고 요동쳤다. 1950년대 미국에서 업계의 광고비는 10년새 60억달러에서 120억달러로 늘었다. 미키마우스, 훌라후프, 코카콜라, 토요타 승용차…, 이런 것들이 베이비부머들의 성장과 함께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990년대 베이비부머들이 사회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일할 나이가 되자 주식가격이 치솟았다. 2010년 이후 부머들이 대거 은퇴한 뒤에 주가가 떨어질까 하는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부머들은 과거 어느 세대보다 동질성이 강했다. 여기엔 텔레비전 영향이 컸다. 전직 <엔비시(NBC)방송> 최고경영자였던 브랜든 타티코프는 “텔레비전 그 자체가 베이비부머였다”고 말했다. 1948년 미국의 텔레비전 대수는 40만대가 채 안됐지만 1960년엔 전체 미국가정의 90% 이상이 텔레비전을 보유했다. 부머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지켜봤고 베트남전의 참상을 목격했다. 1964년 비틀즈의 미국 상륙도 텔레비전으로 미국과 전세계에 전해졌다. 역사학자 스티브 길론 교수(오클라호마대학)는 그의 책 <부머 네이션>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부머들은 사상 처음으로 동일한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텔레비전이야말로 부머 세대와 그 이전 세대를 구분짓는 잣대였다”고 썼다.

TV보급으로 동질성 형성

첫 베이비부머 케슬린 케이시는 “정말 놀라운 시대를 지나왔다”고 말했다. 그의 인생은 지난 세기 베이비부머 항로의 축소판이다. 그는 부모 세대처럼 일찍 결혼했지만, 그뒤 혼자 공부해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가졌다. 베트남전에 반대했고, 존 에프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에 통곡했다. 첫 남편과 이혼했고, 재혼했다. 이제 그는 사회봉사 활동을 하며 노년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다양성이 우리가 미국사회에 남긴 유산”

1946년 1월1일생 베이비붐 세대 1호 케슬린 케이시

20세기를 바꾼 그들 ‘고령화 사회혁명’ 을 연다


1946년 1월1일 1초에 태어난 첫 베이비부머 캐슬린 캐이시 커슬링은 60살이 된 소감을 묻는 질문에 “60이란 단지 숫자일 뿐 나는 여전히 젊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뉴저지 체리힐에서 대학교수인 남편 패트릭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전화인터뷰에서 “나는 앞으로도 내가 하고싶은 일을 계속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
베이비부머가 미국사회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이라고 보나.

=다양성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다양성을 추구했고 우리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고교 시절 우리 반에 흑인은 단 한명 뿐이었다. 지금은 그런 학교를 찾기 힘들다. 내가 어렸을 적엔 여자는 집에서 남편을 내조하고, 이혼을 하면 안되는 것으로 배웠다. 지금은 여성들이 일하는 게 당연하게 됐다. 나 역시 스스로 내 일을 찾았고, 1985년에 첫 남편과 이혼했다. 좋든 싫든 이혼은 베이비부머 세대의 하나의 특징이다.

­베이비부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세가지를 들라면, 당신은 무엇을 꼽겠나.

=우선 베트남전쟁이다. 나는 전쟁에 반대했다. 내 친구들 모두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나 내 남편은 종군의사로서 베트남전에 파견됐다. 개인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다. 정부는 더 빨리 우리 병사들을 베트남에서 철수시켰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나는 17살이었다. 그는 너무 젊고 역동적인 사람이었다. 아마 우리 세대에 이처럼 충격적인 사건은 없을 것이다. 몇년 뒤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됐다. 나는 그의 유해를 실은 기차가 (워싱턴으로 향하는 걸) 철길에 나가 직접 지켜봤다.

또하나는 민권운동이다. 그것은 부정의에 대항한 싸움이었다. 흑인 민권운동, 그리고 여성권 운동 등을 통해 지금 우리는 1960년대보다 더 나은, 더 다양한 사회에서 살게 됐다.

­1960년대 당신은 ‘폴 걸’(비틀즈 멤버 가운데 폴 메카트니를 좋아하는 소녀들)이었다고 들었다. 비틀즈와 로큰롤이 당신 세대에 어떤 의미가 있나.

=1950년대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였다면, 엘비스 뒤에 비틀즈가 우리를 찾아왔다. 비틀즈는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을 주었고, 우리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를 줬다. 그들의 그런 면이 베이비부머 세대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비틀즈가 음악을 바꾸고 세계를 바꿨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란 비판도 많다. 이런 비판에 동의하나.

=물론 우리는 개성을 중시한다. 그건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회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지난해 10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엄습했을 때 나는 자원봉사자로 루이지애나를 찾아갔다. 4만~5만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미 전역에서 모였다. 대부분이 베이비부머였다. 난 그곳에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진정한 지도자들을 많이 봤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베이비 붐은 전쟁 탓?

1946년 미 인구조사국 직원들은 갑자기 출산률이 급등한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외 파병병사들이 대거 돌아오면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일 거라 생각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베이비붐(baby boom)은 1964년까지 18년간 계속됐다. 베이비붐의 마지막 절정이었던 1964년엔 미국 인구의 40%가 20살 이하였다. 지금 20살 이하 인구 비율은 30%이다.

1964년을 고비로 출산률은 떨어졌다. 출산률이 다시 떨어진 이유로는 피임약 보급의 대중화가 꼽힌다. 또 여성권 신장과 함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난 게 더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참전군인 귀환으로 촉발된 베이비붐이 18년씩이나 오래 지속된 이유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온다. 새로운 치료약이 많이 개발되면서 영아 사망률이 급격히 낮아진 게 한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경제가 활황을 거듭하면서 다산을 장려하는 사회적 인식이 형성됐던 탓도 있다. 전통적 가치와 함께 경제적 풍요로움은 여성들이 집에서 아이를 많이 낳아 키우는 걸 장려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대개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1963년까지 출생자를 가르킨다. 그러나 미국의 스티브 길론 오클라호마대 교수는 “한국에선 (미국과 달리 1960년대 중반의 베트남전 때까지도) 출산률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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