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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4 18:56 수정 : 2005.02.14 18:56

지난 11일 중국의 민영기업 대표 가운데 공산당원이 33.9%에 이른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자본가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공산당원이란 얘기다. 중국공산당 중앙통일전선부, 전국공상업연합회, 중국민영기업연구회 등 세 기관이 공동으로 진행한 이 조사는 민영기업가의 당원 비율이 최근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조사를 처음 시작한 1993년에는 민영기업가 가운데 당원 비율은 13.1%였으나 95년 17.1%, 97년 16.6%, 99년 19.8%로 증가 추세를 보여오다 2002년엔 29.9%로 크게 늘었다.

중국에서 ‘붉은 자본가’가 낯선 존재인 건 아니다. ‘붉은 자본가’라면 국가 부주석까지 지낸 룽이런(89)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그는 신중국 건국 이전 상하이에서 밀가루와 면직물로 재계를 주름잡은 룽더셩의 아들이다. 룽이런은 1949년 이후에도 대륙에 남기로 결정한 ‘붉은 자본가’의 원조다. 1956년 1월15일 룽이런은 상하이의 기업인들과 함께 개인 기업을 국가와 합작하는 형식을 통해 ‘사회주의적 소유’로 전환시켰다. 그날 기업 헌납을 위한 상하이시의 기업인회의에 참석한 룽이런은 앞줄에 앉아 있던 아이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가운데 음악가나 엔지니어가 되려는 아이는 있겠지만 자본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아이는 없겠지?” 룽이런은 그로부터 22년 뒤 자신이 다시 ‘자본가’로 환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1978년 1월17일 덩샤오핑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룽이런과 만나 그에게 국제적인 투자신탁회사를 만들도록 전권을 부여한다. 룽은 이듬해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를 세운 뒤 이 회사를 14년 동안 이끌면서 개혁개방의 초석을 놓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 재림한 ‘붉은 자본가’는 93~98년 5년 동안 국가 부주석을 역임했다.

룽이런의 시대까지 ‘붉은 자본가’는 예외 없이 중국공산당이 임명한 ‘당의 일꾼’이었다. 이번 조사 결과는 이 ‘붉은 자본가’의 구성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여준다. 90년대 초반까지 ‘붉은 자본가’는 국영기업이 민영기업으로 개조한 뒤 원래 국영기업 관리자였던 당 간부가 민영기업의 대표를 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조사 보고는 구체적인 수치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전문기술직, 자수성가한 풀뿌리형 기업가 등이 입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최고 관심사는 “기업을 잘 운영하는 일”이지만 “당·정 간부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입당 동기가 원만한 기업 운영에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는 신세대 붉은 자본가들이 룽이런 시대와 달리 철저하게 개인적·영업적 동기에서 입당을 선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자본가’의 급증은 2002년 당 16기 전국대표대회를 전후해 벌인 ‘자본가 입당 캠페인’에 힘입은 바 크다. 중국공산당은 16기 대회 때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자계급의 선봉대”라고 규정했던 ‘당장’(당규약)을 개정해, 이 구절 뒤에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과 중화민족의 선봉대”라는 구절을 덧붙임으로써 공산당이 자본가까지 포함한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정당’으로 거듭나도록 했다. 자본가가 요직을 차지하는 공산당을 보며 옛 좌파는 혼란에 빠졌고, ‘사회당’이나 ‘인민당’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90살을 코앞에 둔 중국공산당은 다시 새로운 실험대 위에 올라섰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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