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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0 19:55 수정 : 2005.02.20 19:55

중동 다시 깊이보기

1. 아라파트 이후의 팔레스타인
2. 석유와 내전-수단의 명담
3. 이슬람주의 마지막 불꽃, 알제리
4. 중동의 관광대국 꿈꾸는 튀니지
5. 리비아, 투항인가 변신인가
6. 모로코의 정치개혁 실험
7. 중동평화와 이집트의 선택
8. 이슬람주의 산실, 알아즈하르 대학
9. 유헙행 둘러싼 터키의 고뇌
10. 좌담

지난해 12월25일, 5년 만에 다시 수단으로 향하면서 ‘여전히 전기 끊어지기가 다반사고, 남북 평화협정에 관한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1982년부터 10년간 유학했고 99년에도 방문했기에 수단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83년부터 계속된 남북 내전으로 200만 이상이 목숨을 잃고 400만 이상이 난민이 된 수단은 누구에게나 내전의 홍역을 겪는 세계 최빈국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고 놀라운 광경들이 펼쳐졌다.

남부 6년뒤 통합-분리독립 주민투표
30억 배럴 원유 분배 새 변수 떠올라
경제회생 기대…수도 하르툼 ‘불야성’

이제 수단은 22년의 내전 종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 변신의 주요한 동력은 석유였다.

◇ 제국주의의 유산=수단의 국경선은 모두 자로 잰 듯 직선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1885년 베를린회의에서 종족이나 문화적 동질성은 아랑곳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마구잡이로 국경선을 설정했기에 오늘날 아프리카 종족분쟁은 끊일 줄 모른다. 수단도 무려 500여 종족에 언어는 150여개 정도다. 수단 남북 내전은 198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영국이 남북을 이간하는 식민정책을 채택함으로써 1956년 1월1일 독립 이전부터 그 불씨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남부수단은 많은 석유와 천연자원, 축산자원을 가지고 있기에 북부의 중앙정부는 남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1983년 오랜 독재를 해오던 누메이리 전 대통령이 정권유지를 위해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샤리아(이슬람법) 도입을 통해 자치권을 누리던 남부의 자원을 장악하려 하자, 남부인들이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결성해 정부군에 대항함으로써 유혈전쟁이 시작됐다. 89년 6월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오마르 바시르 현 대통령은 96년 수단을 테러지원국이라 비난하며 외교적 제재를 가하자는 유엔 안보리 결의 1054호와 1070호가 통과되자 99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의장 하산 투라비도 축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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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 정부는 앞선 정권들이 겪었던 남부수단 통합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권 초부터 요직에 남부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남부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기에 이슬람화 정책으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결국 남북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수많은 과정을 거쳐 지난 1월9일 케냐에서 중앙정부의 타하 부통령과 수단남부인민해방기구 수장인 존 가랑이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로써 앞으로 6년 동안의 자치기간을 거쳐 남부인들은 투표를 통해 독립이냐 통합이냐를 택하게 되었다.

평화협정 20년 내전 마침표

이에 대해 남부인들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 대학의 남부 출신 교수는 “지식층은 통합을 원한다. 독립이 되면 순간적인 기쁨은 있지만 또 다른 내전을 겪게 될 것이므로 진정한 연방제를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도 독립을 쟁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너무나 오랫동안 내전으로 시달렸는데 조용히 잘먹고 잘살게만 해준다면 통합이 무슨 문제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남부인들은 무조건 독립을 원하는 편이다. 수단의 내전은 단순히 아랍인과 흑인, 이슬람과 기독교 두 가지로 설명될 수는 없으며 식민유산, 이념과 새로운 변수인 석유분배 문제가 얽혀 있다.

◇ 변혁의 씨앗, 석유=수단은 지금 석유산업으로 온 국민이 꿈에 부풀어 있다. 독립 이전부터 서구의 석유메이저들이 수단의 석유를 개발하긴 했으나 미국이 테러지원국이라고 비난하며 경제봉쇄 조처를 취한 뒤 석유산업이 급격히 위축됐다. 그러나 중국이 그 틈을 비집고 99년부터 폐쇄된 유정을 재개발하여 석유 수출에 참여하고 있다. 수단의 확인된 원유매장량은 약 30억배럴이고 계속 새 유전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올해 하루 약 50만배럴을 생산할 계획이다.

5년 만에 찾아간 수도 하르툼 곳곳에는 석유 관련 회사들의 간판이 즐비했다. 공항로는 왕복 4차선에서 8차선으로 바뀌었고 고층빌딩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석유는 수단인들의 사고와 생활습관도 바꾸고 있다. 과거에 수단에 진출했던 대우건설이나 삼부토건의 건설현장에서 현지 노동자들은 출근한 날보다 결근한 날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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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99년 여름부터 석유가 생산·수출되면서 거리 청소라고는 모르던 사람들이 한밤중에 거리를 쓸고 있었고, 낮 1~2시면 더는 일을 하지 않던 이들이 밤에 불을 훤히 켜놓고 땀 흘리며 건설 공사를 하고 있었다. 칠흑 같던 도로들에는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고, 이전에는 개념조차 없었던 대형 쇼핑몰들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다. 나일 강변에 줄지어 들어선 고급 음식점에서는 호화판 결혼식도 열린다. 유학시절 휘발유를 사려면 몇백미터씩 줄을 서야 했고 설탕 구하기가 보물 구하듯 했는데 이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었다. 물론 석유가 가져온 이런 풍요는 수도에만 국한돼 있고, 부의 분배가 시골 곳곳에 스며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경제개발이 국민통합 관건

수단 국제아랍어교육대학의 압둘 하디 교수는 “수단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끝에 알라의 은총으로 석유 덕을 보고 있다. 다만 현 정권이 이 경제개발 드라이브를 어떻게 좀더 효과적으로 운용하느냐가 수단의 민주화는 물론 국민통합의 관건이 된다”고 전망했다. 바시르 정권은 혁명 초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본인의 세력확대에 집중하느라 경제는 소홀히 했으나, 이제 정적 제거와 평화회담에 대한 희망이 느껴지자 자신감을 얻어 경제회생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다른 변화도 수단사회에 몰아닥치고 있었다. 유학시절이나 5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히잡을 쓴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세월의 흐름=서구문물 도입=이슬람 퇴색’이라는 도식은 편견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인 무흐신의 어머니에게 요즘 수단이 어떠냐고 물으니 ‘모든 게 알라의 은총’이라며 눈물까지 흘렸다. 70대 어머니의 눈물 속에는 그동안 수단인들이 겪었던 인고의 삶이 묻어났다. 석유라는 선물은 내전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발전의 기반이 되고 있다. 수단 중앙정부가 석유가 가져다준 부와 권력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공존의 실마리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김종도/명지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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