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0 21:14
수정 : 2005.02.20 21:14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적절히 활용해 경기변동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각 나라의 거시경제 성과는 크게 달라진다. 유럽경제의 호황 여부는 유럽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큰 독일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독일경제를 알려면 먼저 사회적 시장경제를 세운 전후세대를 이해해야 한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이 세대는 1차대전과 2차대전 직후 화폐개혁을 두 번이나 겪었고, 인플레이션의 폐해를 처절하게 실감해 물가안정을 절대적으로 중시했다.
실물경제를 책임지고 선거도 의식해야 하는 정부는 물가안정 외에 실업문제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사민당 정부는 실업문제에 더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어 화폐가치 안정을 책임지는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80년대까지만 해도 사민당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일수록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약했다. 그러나 독일은 예외였다. 독일은 사민당이 강력했지만, 독일연방은행은 물가안정을 중시하는 국민적 합의를 기반으로 높은 독립성을 유지했고 물가안정 위주의 통화정책을 고집스럽게 펴나갈 수 있었다. 사민주의와 케인스주의의 정책적 친화성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케인스주의의 정책 영향력이 약했던 독특한 나라다. 70년대 케인스주의 정책을 폈던 나라들이 대부분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고생할 때 물가안정 위주의 통화주의 정책을 고집한 독일은 안정적 경제성장을 누렸다. 이를 계기로 독일연방은행은 자신들의 정책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90년대에 통일비용이 급속히 늘어 재정적자가 증가하고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하자 독일 연방은행은 바로 고금리 긴축정책으로 대응했고 독일경제는 더욱 위축되었다. 독일 연방은행의 긴축정책은 독일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독일의 고금리는 유럽환율조정체계(ERM) 국가들의 통화가치를 하락시켰기에, 유럽경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국가들도 독일의 고금리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유럽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연방은행의 고금리 정책이 적절한 것이었냐는 두고두고 논란이 된다. 통일이라는 전환비용과 역사적 과도기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낙후된 동독지역에 적극적 투자가 필요한 중요한 시기였는데, 독일연방은행이 오히려 찬물을 뿌렸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은 한 나라의 중앙은행을 평가하는 말로는 지나치다고 할 수 있는 “어리석다”는 표현으로 독일연방은행의 통화정책을 혹평할 정도였다.
1998년부터 업무를 시작한 유럽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서도 독일연방은행의 전통이 이어졌다. 유럽중앙은행은 세계에서 가장 독립적인 중앙은행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통화정책 성과는 실망스럽다. 프랑스의 아글리에타는 유럽의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유럽중앙은행이 금리하락 결정을 지체했기 때문에 유럽의 불황이 심화됐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경기변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경기 대응적인 통화정책을 기민하게 펴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재정정책이라도 적극적인 구실을 해야 하지만, 성장안정협약이 재정정책의 신축적 대응을 제한하고 있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금융자본은 자본이동의 자유를 무기로 실업문제보다 물가안정을 더 중시하는 거시경제정책을 요구한다. 우리는 물가안정이 우선되는 금융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중앙은행 독립성은 바람직한 거시경제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 민주적 대표성이 없는 금융 엘리트들은 일반 국민들보다 금융계의 선호를 더 중시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중앙은행 독립성은 민주성과 상충할 수 있다. 중앙은행 독립성에는 투명한 책임성이 뒤따라야 한다.
조영철/국회 산업예산분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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