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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0 21:53 수정 : 2005.02.20 21:53



중국농민 수탈한 관료들 낱낱이 고발

△천구이디는 1942년 안후이성 화이위안현에서, 우춘타오는 후난성에서 태어났다.
△1991년 안후이성 문학교실에서 만나 이듬해 결혼.
△1993년 “가장 뜨거운 쟁점과 큰 주제에 관한 보고문학”을 공동으로 쓰기로 합의한 뒤 부부의 첫 작품 〈비극의 탄생〉 출간. 한 기업가의 죽음과 관련해 100여명에 이르는 관료의 문제를 들춰냈다. 이 때문에 안후이성 벙부시 시위원회가 발칵 뒤집혔다.
△1994년 두 개의 성에 걸친 관료의 비리와 관련된 〈한차례 사기의 배후〉 발표. 이 작가 부부의 두 번째 공동 작품으로 인해 성 검찰장 면직당함.
△1996년 화이허가 관통하는 4개의 성, 64개의 도시를 돌며 조사한 끝에 〈화이허의 경고〉 발표. 〈남방주말〉에서 천구이디를 ‘이번 주의 인물’로 선정함.
△2004년 1월 〈중국농민조사〉 단행본 출간. 2월 당국 금서로 지정.

“지금이야말로 서릿발 같은 포청천이 필요”

작가 천구이디(63·왼쪽)와 우춘타오(42·오른쪽) 부부는 지난해 중국에서 ‘농민 문제’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벽두에 펴낸 보고문학 〈중국농민조사〉(중국인민문학출판사 펴냄) 때문이다. 두 작가의 활동무대이던 안후이성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지방 관료들의 수탈과 비리를 고발하고 그에 대한 농민의 저항을 기록한 이 책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농촌과 농민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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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빈곤 심각…세금 안걷어도 여전히 가난
중국은 도대체 개혁·개방하는지 알수 없어
인민에게 꿈을 줄 용기있는 청백리 있어야

지난해 2월 당국은 출간 한달 만에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으나, 해적판의 왕국인 중국의 지하인쇄소에서 찍어낸 복사본이 800만부 이상 팔려나간 것으로 추산된다고 천구이디는 말했다. 이 책은 홍콩과 대만에서도 출간돼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켰으며, 영어와 일본어 번역본도 곧 나올 예정이다. 지난해 10월엔 세계 각국의 보고문학에 주는 상인 독일 레트레 율리시즈 르포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 책 출간 이후 천·우 부부의 집은 농민들이 몰려와 온갖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호민관의 집’으로 변했다. 사회주의 중국에는 하급기관이 잘못된 점을 상급기관에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상방(상급기관을 방문한다는 뜻)이라는 관례가 있다. 오늘날 ‘상방’은 주로 토지를 빼앗기거나 부당한 처분을 당한 농민들이 성 정부나 베이징에 올라와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일을 말한다. 안후이성 허페이(합비)에 있는 천·우 부부의 집은 농민들 사이에서 ‘선팡잔’(상방하러 올라온 농민의 민원을 청취하는 곳)이라는 별명으로 불려 왔다.

〈중국농민조사〉 출간 이전에 천·우 부부는 이미 화이허(안후이성을 흐르는 강)의 극심한 오염 실태를 생생하게 고발한 〈화이허의 경고〉라는 보고문학으로 제1회 루쉰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중국에서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속으로 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인 농촌 현실과 생태계 파괴의 실상을 깊이있게 파헤친 천·우 부부는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천·우 부부는 지난해 11월 말 베이징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16일 베이징 남동쪽 다싱구의 아담한 아파트로 작가 부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천구이디는 새로운 보고문학 원고 〈포청천의 유골〉(가제)에 서문을 쓰고 있었다. 지난해 8월 〈중국농민조사〉에 등장하는 지방 관리 장시더의 명예훼손 고소고발 사건으로 법정에 서는 등 ‘홍역’을 치렀건만 이 두 작가 부부는 조금도 움츠러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올해 초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농민·농촌 관련 조사 결과를 보면, 중국의 도·농 격차가 되레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한겨레〉 8일치)

=3농(농업·농촌·농민) 문제는 중국만이 가진 특수한 문제다. 미국엔 농업 종사자는 있지만 농민은 없다. 일본의 농촌은 도시의 연속이다. 타이조차 도·농 격차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중국의 3농 문제 해결을 위해선 우선 농민을 부유하게 만들고, 농민을 줄여나가다 마지막엔 농민을 없애야 한다. 농민이 가난한 이상 당 중앙이 목표로 하는 소강(小康·샤오캉)사회(기초적인 의식주문제가 해결된 사회)에 결코 진입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게 시급한 문제인가?

=농민의 빈곤은 심각한 지경이다. 당장 농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방대한 관료조직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 통계를 보면 “36명의 농민이 1명의 관리를 먹여살려야 한다”고 한다. 농민들은 향·전(가장 말단의 행정조직) 인민정부조차 “외교부 빼곤 정부부서가 모두 다 있다”고 말한다. 최근 당국의 농업세 면제 조처는 바람직하지만, 정부가 세금을 한 푼도 거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농민은 여전히 가난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조세개혁 이외에 식량증산, 농민금융, 호적제도, 농촌 의료제도, 농촌 의무교육 제도 등 전반적인 개혁을 동시에 추진해야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수 있다. 지금 농민의 자녀는 열악한 교실에서 의무교육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며,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아프면 바로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절판된 〈화이허의 경고〉 재출간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중국보고문학협회와 인민문학출판사는 1978년부터 지난해까지 나온 보고문학 가운데 중요한 작품 12편을 시리즈로 다시 묶어내기로 했다. 〈화이허의 경고〉 또한 그 가운데 한 권으로 뽑혀 올해 1월 재출간하기로 돼 있었다. 이 책은 99년 중국 건국 50돌을 기념해 제정된 인민문학상과 루쉰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책은 재출간 이전에 ‘상급기관’의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통보가 내려왔다. 정부가 제정한 보고문학 최고 영예의 상을 받은 작품에 대해 ‘재심사’를 해야 한다니, 중국은 도대체 개혁·개방을 하고 있는 건지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화이허 주변의 민중들은 오늘날 화이허를 두고 이런 민요를 부른다. “50년대엔 (화이허에서) 쌀과 채소를 씻었고, 60년대엔 옷 빨고 논물 댔고, 70년대엔 물이 나빠졌고, 80년대엔 물고기 새우의 대가 끊어졌고, 90년대엔 몸과 마음이 해를 입는다.”

-이번에 탈고한 작품을 소개해달라. 포청천은 한국에서도 중국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유명하다. 왜 지금 시점에서 포청천에 대한 보고문학을 썼는가?

=오늘날 중국에선 탐관오리들이 날로 늘고 있고, 독직자들의 직급도 점점 높아져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부패 척결에 서릿발 같은 기상을 지녔던 깨끗한 공직자 포청천의 정신을 드높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그에 관한 보고문학을 쓰기로 했다. 본디 〈중국농민조사〉를 쓰기 전에 ‘포청천의 유골’ 문제에 관한 자료를 모아왔다. 그러나 중국 농민현실에 대한 고발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에 뒤로 미뤘다. 지난해 〈중국농민조사〉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주장하는 지방 관리 장시더의 소송으로 법정에 불려다니면서 ‘깨끗한 관리’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포청천 유골’ 문제란 어떤 내용인가?

=이번 원고의 중요한 비밀인데 …(웃음). ‘유골’ 문제는 이번 작품의 소재다. 포청천은 안후이성 허페이 사람이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3년 정부는 허페이에 시멘트공장을 세우느라 포청천 가문의 일가족 3대 11명이 묻힌 무덤군을 파헤쳤다. 중국 백성이 대대로 신처럼 숭상해온 청백리의 가족묘에 삽을 댄 것이다. 당국은 포청천을 포함한 이들의 유골을 다른 곳에 이장하려 했지만, 일종의 ‘금기’ 때문에 어느 마을도 그들의 유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포청천과 일가친지의 유골은 노천에서 겨울을 지냈다. 지난 천년 동안 온갖 반란과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평안히 잠들었던 포공(포청천에 대한 높임말) 일가도 문화대혁명만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후 포청천의 후손들이 사는 샤오바오춘 마을 사람들이 비밀리에 자신들의 마을로 유골을 모셔와 한밤중에 이장했다. 이때 이장에 관계한 중요한 인물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느 것이 포청천의 유골인지 확인할 수 없어 그의 두개골과 다른 유골이 아직도 분리돼 있는 상태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의 유골 문제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유골 문제만이 아니라, 그의 무덤 묘비명엔 7천여자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포청천에 관한 공식 역사서 기록의 3배가 넘는 풍부한 내용이다. 이를 통해 포청천의 정신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것이다. 기록을 한 가지 소개하자면 포청천은 황제가 총애하는 귀비의 아버지가 저지른 비리에 대해 두 번 상소를 올리고 7번 보고를 해도 듣지 않자 황제를 알현해 직접 귀비의 아버지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록을 보면 이때 얼마나 그가 격정적으로 상소를 했는지 침이 황제에게까지 튀었다고 나온다. 오늘날 당 중앙의 고관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렇게 목숨 걸고 나설 수 있는 용기있는 청백리가 과연 있겠는가. 인민에겐 꿈이 있어야 한다. 문화대혁명이 훼손한 포청천의 깨어진 묘비와 흩어진 유골을 다시 수습하면서 우리는 포청천의 가을서리 같은 기상을 되살리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인터뷰 뒤안길

21살 어리지만 “아내가 담대한 사랑”

천구이디·우춘타오 부부는 루쉰, 라오서 등 현실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아끼지 않은 중국 보고문학의 적통을 이어가는 이들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들을 맺어준 것도 ‘루쉰작가교육반’이었다. 1991년 이 작은 문학학교에서 연장자인 천구이디는 ‘반장’이었다.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좋아했다. 우춘타오와 기숙사를 함께 쓰던 여학생도 ‘천 반장’을 좋아해 우의 손을 이끌고 함께 놀러갔다.

천은 “온갖 사람의 손가락질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되/ 어린아이를 위해서는 즐겨 무등말이 되리”라고 한 루쉰의 문학관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루쉰이 “중국의 작가 가운데 가장 강골”이라고 말한다. “중국 문학은 현실 기피의 성향이 있지만 루쉰은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정작 루쉰과 같은 계열의 작가로 만든 건 아내 우다. 천은 본디 순수문학 계열의 소설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우가 보기에 “그가 묘사한 남자는 여자같고, 여자는 남자같았다.” “남편은 인민을 걱정하고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며 깊은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다. 전형적으로 ‘무일푼이면서 국가 대사를 담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보고문학이 더 적합할 거라고 권했다.”

천은 “진실을 쓰는 대가는 크고 위험하지만, 아내는 ‘진실을 쓰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다’라고 다그쳤다”며 “아내는 연약한 남자를 업신여기는 담대한 사람”이라고 털어놓는다. <중국농민조사>를 쓸 때도 우는 천에게 “9억 농민을 위해 썼는데 뭐가 겁날 게 있는가”라고 말했다. 천에겐 이 말이 어떤 위협과 협박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의 원천이 됐다. 실제로 농민들은 책이 나온 뒤 천·우 부부에게 수없이 전화를 걸어 지지를 보냈으며 “당신들이 위험에 빠지거나 감옥에 갇히면 아이를 대신 키워주겠다”고 한 농민도 있었다.

서재에 걸린 좌우명은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이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작가의 용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베이징/이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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